TV가 10대 망친다
청소년 대상 교양 프로그램 부재, 선정 폭력물은 넘쳐나
대구 지하철 참사로 방송사들이 오락프로그램을
자제하자, 10대로 추정되는 일부 팬들이 시청자게시판에 불만의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지하철인가 뭔가 때문에 논스톱을 못 봤다. 똑같은
속보 방송은 그만하면 됐다” “그까짓 거 하나 때문에 방송을 안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 “오락방송 안 한다고 그 많은 시민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등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10대 팬을 다수 거느린 인기그룹 god가 출연한 프로그램 방영이 취소되자 “내게는
200명의 목숨보다 god가 더 중요하다” 등의 극단적 항의가 잇따라 ‘빗나간 오빠사랑’의 전형을 보여줬다.
오락프로그램 불방을 둘러싼 이번 논란은 청소년 교육의 문제점과 사회 전반에 팽배한 이기적 풍토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TV가
그 동안 10대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왜 10대들은 TV 프로그램에 목을 매는가? 그들이 목매는 프로그램은 왜 ‘빠순이’들만
양산해 내는 저질 방송이 대부분일까?
#실태는?
- 황금시간대 저질 오락물 독식
현재 EBS를 제외한 공중파에서 진정한 청소년 프로그램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KBS가 공영방송의 사명을 내세우고 제작했던 ‘접속! 어른들은
몰라요’ ‘현장다큐, 선생님’ 등의 청소년 프로그램은 각계의 찬사에도 불구,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되고 빈자리는 오락프로그램으로 채운 지 오래다.
작년 12월 미디어세상열린사람들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TV 주시청 시간대(평일 오후7∼11시, 주말 오후6∼11시)의 오락프로그램 편성비율은
KBS1 30.8%, KBS2 69.4%, MBC 66.9%, SBS 67.8%였다.
청소년에게 권할 수 있는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는 것과는 달리, 편성 비율의 절대적 양을 차지하는 오락프로그램의 대부분은 10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프로그램들이 청소년에게 양분을 주기는커녕, 청소년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송의 폭력 수위는 이미 선을 넘어섰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는 대표적인 폭력 드라마다. 폭력집단에 대한 무분별한 미화와 남성성과 폭력성의
동일시 등으로 비난받았지만, 드라마 속 등장인물인 ‘김또깡’ ‘쌍칼’ 등이 또래집단들 사이에 별명으로 불러질 정도로 10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MBC ‘인어아가씨’도 불륜과 복수를 아이템으로 병을 깨는 등의 자극적 장면으로 문제가 됐으며, KBS1 ‘무인시대’도 칼로 목을 베고 여러
번 채찍을 내리쳐 참혹한 상처를 만드는 등 선혈이 낭자한 장면이 많아 시청자의 항의를 받았다.
청소년이 주 대상인 오락프로그램들은 욕설, 비속어 사용 등 언어폭력과 머리 때리기, 외모 비하, 가학적 벌칙 등이 대부분을 차지해 10대의
인격형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수차례 지적 받았다. KBS2 ‘자유선언 토요대작전’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 등의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은
사랑을 게임처럼 경박하게 풀어, 연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외모 중심의 이성 선택관 등 10대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각 방송사의 연예정보프로그램도 청소년 문화를 ‘연예인 추종’에 한정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 연예정보프로그램은 천편일률적인 연예인 사생활과
홍보성 뉴스로만 구성돼, 맹목적인 ‘오빠 사랑’을 부채질한다.
#왜 개선 안되나? - 방송사 상업성, 미디어 교육 없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방송사들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연예인들끼리 웃고 즐기는 쇼·오락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청소년들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시사·교양프로그램도 이른바 ‘일탈 청소년’들이나 ‘영재’ 같은 양극단에 있는 청소년들이 주 관심 대상이다”며 “청소년 프로그램을
위한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강남준 교수도 “청소년의 엄청난 방송 접촉시간을 고려할 때,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청소년에게 심각한 유해환경이다”며, “강력한
규제와 부모의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드라마의 폭력 선정성, 오락프로그램의 저질성과 편성의 불균형은 지속적으로 지적돼 온 고질적 문제다. 그런데 왜 시정돼지 않을까? 방송사는 청소년이
외면하는 청소년 방송을 만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청소년 문화와 미디어 환경의 척박함은 결국 방송사의 상업성과 비판 교육의 부재가
맞물린 결과다.
문화평론가 이용포 씨는 “교육이 변화하는 청소년의 감성을 좇아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오늘날 TV는 성장기 세계관 형성에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즉, 스타시스템으로 점철된 상업적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10대 정서는 자극적인 오락물에만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청소년의 정서를 훼손시킨 책임은 생각지 않고, 시청률을 이유로 계속해서 폭력 선정 말초적인 프로그램의 제작편수를 늘이고 있다. 악순환인
것이다.
방송위원회 심의부 관계자는 “반복해서 지적 받는 프로그램이 많고, PD나 책임자에게 징계를 해도 방송사들이 ‘시청률’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구조적인
문제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대안
없나? - 내용 등급, 청소년 프로그램 의무 편성 법규 마련
근본적 대안은 방송사들이 공익성에 대해 적극적 사명감과 의지를 갖는 것이다. 사회 전반의 폭력에 대한 무관심 또한 개선돼야 한다. 구체적 방안으로
‘등급제’를 현재 시행중이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작년 방송위원회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미성년자의 69.5%가 TV를
볼 때 등급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본인이 시청해서는 안 되는 등급의 프로그램을 본 경험이 있다는 청소년은 79.0%에 달했다. 시청
불가 프로그램을 봤을 때 부모로부터 적절한 지도나 통제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경우는 32.3%에 불과 해 가정의 시청 지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괄적인 연령등급 기준과 등급을 구분하는 주체의 모호성도 문제로 지적돼 왔다. 획일적인 연령 기준 하의 등급보다는 구체적인 내용 정보를 주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등급 구분의 주체도 전적으로 해당 방송국에 위임돼 있어 구분의 기준이 자의적인 것도 문제다.
미국은 성적묘사가 등장하는 경우 S(sex), 폭력적인 경우 V(violence), 욕이나 은어가 등장할 경우 L(language) 등으로
표시하는 내용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TV에 V칩(Violence Chip)을 의무적으로 장착해 기술적으로 유해 프로그램을 차단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은 청소년 프로그램을 위한 법을 1990년도부터 제정해 적용하고 있다. 청소년 프로그램은 정규적으로 편성해야 하며, 프로그램
길이는 최소 15분 이상, 방영시간은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로 규정 내용도 구체적이다. 각 방송사가 이러한 요건에 맞는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을
일주일에 3시간 이상 의무적으로 방영해야 한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는 “청소년 프로그램은 적은 인원, 적은 제작비, 방송사의 투자부족 등으로 다양성 부족은 물론 질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사의 어린이와 청소년 중시는 구호에 그치고 있다. 청소년 수용자의 주권을 실현해야 한다”며 방송사의 각성과 제도마련을 촉구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