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안나온다고 욕하지 마라!
웃기면서 눈물나는 연극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
중산모, 콧수염, 뒤뚱뒤뚱 걸음걸이. 이 세가지만 나열해도 채플린은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채플린을 진정 채플린답게 만드는 소품이 한가지 더 있다. 바로 지팡이다. 지팡이를 뱅그르 흔들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채플린의 뒷모습을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으로 떠올리는 관객은 많을 것이다. 방랑의 길을 떠나는 채플린에게 지팡이는 친구이자 버팀목이다.
그런데 만약 채플린의 손에 지팡이가 들려있지 않다면 어떨까? 마치 그 흔한 말처럼 ‘앙꼬 없는 찐빵’같을 것이다.
극단 작은신화의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은 이점에 착안했다. 채플린에게 지팡이가 없으면 허전하듯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필수요건을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한다.
세가지 에피소드 반전 구성
극은 세가지 에피소드와 두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됐다. 산부인과 지하철 다리 위를 배경으로 각각 탄생 일 죽음이 소재로 다뤄졌다.
1부에서는 임신한 여자와 낙태수술을 받으러 온 여학생이 말다툼을 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며 설득하는 여자에게 학생은 단지 재수없게 생긴
것뿐이라며 반박한다. 점점 흥분하던 임산부는 결국 뱃속에서 보자기뭉치를 꺼내들고 절규한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구박받는 여자와 아이가 생겨
거추장스런 여자의 대립이다.
2부에서는 소심한 청년이 지하철에서 물건을 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팔려고 했으나 매번 입 한번 못열고 돌아선다. 결국 그가 용기내 장사를
시작하는 곳은 아무도 없는 주차장 한켠이다. 그마저도 자동차에 자리를 빼앗긴다.
3부는 자살하려는 사내와 이를 방해하는 노인이 등장한다.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고 주장하는 노인과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 있다는
사내는 신경전을 벌인다. 결국 노인이 주는 막걸리를 받아 마시던 사내는 살아서 다리 위를 내려오고 혼자 남은 노인은 반대로 죽음을 준비한다.
세가지 이야기의 구성은 일괄성을 지닌다. 미소를 머금게 하고 때론 박장대소하게 하는 재미난 상황이 전개되다 웃음을 무안하게 만드는 반전이
나타난다. ‘아’하는 감탄사가 나오고 가슴속에서 솟아
오르는 울컥거림도 느낄 수 있다. 반전을 축으로 웃음과 슬픔이 대응한다. “웃기면서도 눈물나는 연극”을 표방했다는 서현철 연출자의 의도가
제대로 적중한 것이.
삶에 대한 연민
공원 벤치에 앉아 삶은 계란을 먹으려는 노인의 ‘처절한’ 시도를 다룬 막간극은 모든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실패 후 소금을 찍어먹으며
아쉬움을 달래는 노인의 표정에서는 소박한 꿈에 대한 좌절감과 인생 막바지에 느껴지는 허탈감이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강하게 느껴진다.
막간극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극 전체의 외침은 ‘살자’다. 산부인과 지하철 다리 위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임신에 광적으로
매달린 여자, 2,000원 짜리 요술저금통을 파는 지하철 잡상인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살아가기 위해 또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바둥댄다.
자살을 결심한 사내조차 담배의 쾌락을 잊지 못하며, 짐 되기 전 죽겠다는 노인도 대화를 통한 사람냄새를 그리워한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마저도
삶에 대한 욕구는 강하다.
때문에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은 ‘연민’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연줄을 놓지 못하는 인물들은 가련하기까지
하다. 특히 노인의 모습이 집중되면서 이러한 정서는 배가된다. 쓸쓸함이 배어나는 노인들을 아이러니한 우스꽝스런 상황에 배치하여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을 극에 달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관객 자신을 향해 돌진한다.
바로 이때 관객은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게 된다. “자신의 삶을 계속 돌이켜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한 박주영 기획자의
말대로 관객들은 자성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줄거리 예측 아쉬움
연극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무겁거나 심각하지 않다.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맛깔스런 극이다. 오랜시간 준비하고 갈고 닦은
노력도 칭찬할 만하다, 청소부 아줌마와 비행청소년의 대사를 매우 일상적이고 사실적 구어체로 표현한 점은 오랫동안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이다.
또한 재치있는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지하철 잡상인들이 판매하는 엽기시계, 음치고정기 등 기발한 소품들과 쓰레기 오브제를 통해 막간극임을
알리는 기지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들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러나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은 흠으로 남는다. 특히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개성을 찾지 못해 ‘저
배우 아까 그 배우네’라는 생각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미친 임산부였던 배우가 멀쩡히 지하철 잡상인으로 등장하면 관객들은 혼동스럽고 괜한
배신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구성의 일괄성으로 인해 결론을 미리 짐작케 한다는 것도 하나의 오점이다. 반전에 대한 기대는 예측으로 전환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나머지 에피소드에 대한 흥미는 반감되고 줄거리는 낯익다.
그렇다하더라도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은 알차다. 지루할 틈 없는 유쾌한 극 속에 삶의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매료된다. 싸구려 웃음을 선사하지도 괜한 무게를 잡지도 않는이 연극이 상업성과 작품성이 맞물린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는
건 단지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