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 올림픽’에서 ‘애국자 게임’까지… 역사의 획을 그은 명작들
후폭풍에 떨고 있다. 탄핵정국이 아니라 영화계 말이다.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광풍의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작들이 자본과 배급망을 장악하면서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더욱 위협받게 된 것. ‘대작편식증'에서 벗어나 작은영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의미로 한국독립영화사에 획을 그은 대표작 10선을 뽑았다. 도식화와 진부함의 위험에도 이 같은 기획을 구상한 것은, 많은 경우가 독립영화 활성화의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체질적 거리감을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과 담론 속, 곳곳을 누비며 스크린에서까지 살아 숨쉬기를 멈추지 않는 이 10편의 영화는 독립영화 왕초보를 중독자로 바꿀 힘이 있다고 믿는다. |
1980년대, 사회변혁 꿈꾸는 저항영화
한국독립영화는 1982년 설립된 최초의 독립영화단체 ‘서울영화집단’으로 시작됐다. 이 단체는 ‘파랑새’ ‘그 여름’ 등 정치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고발하는 저항영화를 내놓으며 한국독립영화의 원형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사회운동의 성장과 함께 영화운동도 활발해졌다. ‘상계동 올림픽’(1988)은 그 지점에서 탄생한 한국 최초의 독립다큐멘터리다. 김동원 감독은 대부분의 매체와 대중이 88올림픽의 화려함에 눈멀어 있을 때 올림픽 이면의 그늘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외국손님을 의식한 정부는 무차별 재개발사업을 시행했고, 상계동 주민들을 비롯한 서울 200여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상계동 올림픽’은 철거민과 함께 3년을 생활하며 그들의 투쟁과 아픔을 생생하게 담아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1989년 ‘오! 꿈의 나라’와 함께 나타난 영화집단 ‘장산곶매’는 다큐멘터리 정신을 계승하면서 극영화의 장점을 활용한 작품들로 독립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광주항쟁과 반미의식에 대한 과감한 소재적 접근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오! 꿈의 나라’는 주제의 형상화와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1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영화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다.
영화운동의 집대성으로 평가받는 동성금속노조 파업을 다룬 ‘파업전야’(1990)는 ‘장산곶매’의 진정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의 탄압으로 상영 자체가 투쟁이었던 이 영화는 대학 가를 돌며 30만명을 모은 독립영화 흥행작이었다.
같은 시기 등장한 산사의 세 수도승의 이야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은 ‘파업전야’와 또 다른 축으로 독립영화사의 굵직한 사건이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이후 잊혀졌던 독립영화의 형식적 미학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제도권 영화에서도 독립영화 진영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배용균 감독은 연출, 제작, 각본, 촬영, 조명, 편집, 미술, 기획을 혼자서 해내 영화가 철저히 개인적인 예술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공간과 시간을 정교하게 짜낸 조형미와 자연의 빛을 이용한 회화적 구성으로 세계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1990년대, 다양한 예술적 실험
1990년대 들어 운동으로 사고되던 독립영화는 사회주의 붕괴, 문민정부 출범 등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흐름을 맞는다. 임순례, 봉준호, 허진호, 문승욱, 송일곤, 김성수, 정지우 등 젊은 3세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고, 개인적이며 예술지향적인 단편들이 쏟아졌다.
이재용 변혁 감독의 ‘호모비디오쿠스’(1990)는 그 시발점이었다. 1991년 클레르몽페랑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영화는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황폐화라는 메시지와 유럽식 실험영화 스타일을 결합해 주목받았다.
김윤태 감독은 전통 서사를 거부하고 복잡한 이미지와 심리를 따라가는 실험영화를 선보였다.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Wet Dream’(1992)에 이어 ‘다우징’(1996)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다우징’은 한 소녀의 불온한 날의 궤적을 따라가며 의식과 일상, 현실화 환상이 모호해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김정구 감독의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1997)는 독립영화 진영에서도 충격적인 작품이다. 모성과 포르노를 대담하게 결합한 엽기적인 이 영화는 독립영화 진영도 자유롭기 어려웠던 예술적 엄숙주의와 모성에 대한 관습적 이데올로기를 재기 발랄하게 공격한 전복적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등 다큐멘터리 진영은 1980년대의 고발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인권, 여성, 문화 등 주제를 다양화시킨 다큐들을 꾸준히 내놓았다. 특히 변영주 감독은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연작으로 종군 위안부 문제를 드러낸 ‘낮은 목소리’(1995)를 제작했고,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극장에 개봉되는 성과를 올렸다.
2000년대, 독립영화거나 아니거나
1990년대 이후 독립영화를 포함한 한국영화는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2000년대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독립영화계는 더욱 풍성해졌다. 규모나 작품성 양측면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둔 독립영화는 정치적 탄압 대신 정부의 지원을 받는 예술 장르가 됐다. 하지만, 부흥 속에는 항상 위기가 잠재돼 있다. 영화가 활발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저예산 영화의 배급 통로는 좁아지고, 관객은 다양한 영화를 만날 기회를 빼앗겼다. 점차 심화되는 탈장르 경향은 독립영화 정체성에 혼란을 안겨주었다.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모호한 경계를 잘 보여준다. 영화는 B급 장르영화의 관습적 양식을 전면에 드러내면서도 독립적 문법과 진지한 주제의식을 깔아 신선 한 바람을 일으켰다. 계층적 차별과 폭력적 사회 현실에 대한 반항, 부조리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 그리고 극사실적 영상과 각종 장르를 뒤범벅한 거친 형식미는 분명 기법적 미숙함을 뛰어넘는 위력과 매력이 있다.
디지털 다큐멘터리인 ‘애국자 게임’(2001)은 다큐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며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애국주의 허구성을 유쾌하게 폭로한다. 공동연출자인 이경순 최동하 감독은 사회 문제를 고발 선전하는 기존 다큐의 엄숙함을 뒤엎고 발랄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 시대 독립영화는 이처럼 각종 경계를 넘나들며 주류상업영화는 물론, 기존 독립영화의 질서 또한 전복시키고 있다. 이른바 독립영화적인 것은 무엇인지, 독립영화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영상 세대는 규정을 거부하면서 무한한 에너지로 대안을 생산하고 있으며, 대안의 또 다른 대안도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