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의 공원’ 꿈꾸는 만능예술인
‘서울노트’의 연출가 박광정
“더
이상 하고 싶은 역할은 없어요. 사이코니 부랑자니 안 해 본 연기가 없으니. 하지만 연출은 욕심나는 작품이 많죠.
최종적 목표는 불후의 명작을 만드는 겁니다. 부끄럽지 않은, 끊임없이 공연되는 작품을 3편만 만든다면 바랄 것이 없죠.”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약방의 감초 같은 코믹 배우, 혹은 개성 강하고 날카로운 성격파 조연배우로 대중의 뇌리에 박힌 박광정(41). 편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해 연기자로 얼굴을 알렸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불후의 명작’을 꿈꾸는 연출가다.
1993년 ‘마술가게’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했고, ‘비언소’ ‘모스키토’ ‘날 보러와요’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그는,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연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2001년 5월 ‘극단 파크’를 창단했다.
‘개그맨과 수상’을 창단작으로, ‘체크메이트’ ‘유리동물원’에 이어 현재 ‘극단 파크’는 네 번째 작품 ‘서울노트’(4월13일까지 정보소극장)를
공연중이다. ‘서울노트’는 일본 유명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도쿄노트’를 번안한 것으로 근미래와 전쟁, 갤러리라는 독특한 배경에
차분한 연극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상의 조각들, 관객의 그림맞추기로 완성
“우리 연극계의 유명한 작품들이 일본 연극을 흉내냈다는 소문도 있어서 일부러 일본 연극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박광정은 처음 ‘도쿄노트’를
접했을 때는 “참 심심한 작품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작품의 대사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읽을수록 진정성이 크게
보이기 시작해” 공연을 결심했다.
‘서울노트’는 절제된 조명과 음악, 일상적 대사로 진행되는 일종의 극사실주의 연극으로 스스로 ‘교육방송 불방용’이라고 표현한 그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시끄럽고 적나라한 형식을 주로 선보였기 때문에 ‘조용한 연극’이라는 스타일면에서 전작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표현법이 조금 차이나는 것이지 내용은 상통하죠.”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과 일상의 탐구”라는 면에서 지금까지 작품들의 연장선상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서울노트’는 ‘여기, 현재’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연출 포인트다.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 캐릭터와 상황, 언어 등을 한국적으로 수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라크 전쟁이 최대의 이슈인 시점에 마침 연극의 배경이 3차세계대전인 점이 눈길을 끌지만, ‘서울노트’는 작년부터 준비한 작품으로 ‘시의성’을
노린 것은 아니다. 몇몇 연예인처럼, ‘반전’ 메시지를 부각시킨 홍보로 상업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박광정은 단호하게 “역효과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무대에서까지 보고 싶어하지 않죠. 코미디가 잘 나가는 것도 그런 심리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는 ‘서울노트’의 진정한 매력은 규정된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17명의 인물을 하나하나 작은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이 그림들을 붙이면 어떤 그림이든 만들 수 있죠. 능동적으로 관람하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연극이에요. 그림 조각들을 관객이 직접 맞추는
거죠.”
특별한 구호나 이념은 없다
그는 자신이 배우가 된 계기를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연극과의 인연은 81년 성균관대 공대 극예술연구회 동아리에서 시작됐다. 말년 병장 시절에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간을 떠올렸더니 바로 성대에서 연극할 때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연출을 배우기 위해 87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워크숍에서 스탭만 하다가 어느날 남자 배우가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게 됐다.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배우의 길이지만, 연기 경험은 그의 연출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었다. “연기를 해 본 연출가와 안 해 본 연출가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180도 다른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연출스타일에 대해 “외부에서 규정할 부분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연출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배우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만큼 혹독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잔소리만 늘어가요. 어른들이 왜 잔소리를
많이 하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요즘은 알 것 같아요.”
극단 이름은 단순히 박광정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작지만 편안한 휴식처,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원 같은 극단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파크(PARK)’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극단의 색깔에 대해서도 강박관념을 버렸다. “거창한 목적이나 특별한 구호,
이념 같은 것은 없어요. 하다보면 스타일이 생기겠죠.” 그는 “그저 연극을 즐거운 마음으로 잘 만드는 집단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운영의 어려움은 역시 ‘돈’ 문제다. “공기만 가지고 연극을 만들 수는 없죠. 국가지원극단이 되고 싶습니다. 하하.” 결국 CF, 드라마,
영화에서 번 돈으로 연극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무력한 연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중인 영화 ‘진술’에 대해서는 당분간 인터뷰를 보류했다. 하일지 원작의 ‘진술’은 그가 재작년에 무대에 올려 호평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 시나리오 수정작업 중이며 문성근이 주연으로 캐스팅 된 상태다. 그는 “오래전부터 거론해왔는데 계속 제작이 연기되는 상황이라 모든 것이
확실해 질 때 인터뷰를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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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작지만 편안한 휴식처,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원같은 극단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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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가을에 소개할 ‘선행상장’을 준비하고 있고, 연기는 영화 촬영 이후로 미루었다. 그는 “다음달에 TV에 출연하면 영화가 엎어진 줄 알면
된다”며 웃었다. ‘서울노트’는 극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정기 공연할 계획이다. 그만큼 애정이 깊은 작품이다.
‘서울노트’ 팜플릿에 실린 ‘연출자의 글’에는 그가 연극을 만드는 이유를 대변해주는 대목이 있다. “작품을 준비하는 도중에도 ‘로또 광풍’
‘대구지하철 참사’ ‘북한 핵문제’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아서 연극은 참으로 무력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