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대한 성찰과 고백
영화에 담겨진 승리자의 동정, 희생자의 분노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정의’라는 이름 하에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전쟁을 일으킨 미국,
경제논리에 의해 전쟁을 찬성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국가들, 그 안의 반전평화의 목소리….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전쟁의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 희생자들의 상처는 또 얼마나 큰지 우리는 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전쟁영화를
짚어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마련해 보았다.
너무나 미국적인
작년에 개봉한 블랙 호크 다운(2002 미국)은 1993년 10월 레인저와 델타포스 등 미군의 특수 부대가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시를
장악하고 있는 반군 사령관을 체포하려고 시도한 기습 작전의 실패담을 그리고 있다. 당시 미군은 민병대에 18시간 동안 포위 당한 채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이 때문에 소말리아인 1,000여명과 미군 19명이 희생됐다. 영화는 메마르고 잔인한 전투신을 부각하고 전우애와 희생정신을
주제로 삼는다.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사실적이고 절제된 전쟁영화’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철저히 미국인의 시각으로 그려졌다. “우리편을 적진에 버려두지 않는다”고 외치는 특공대의
외침 뒤로 수없이 희생된 소말리아 민간인들은 축소돼 보여진다.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 왔다는 ‘고마운’ 미군들에게 소말리아인들이 왜 총을
쏘며 분노하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미군들의 극한상황 속에서 피어난 희생정신과 영웅적 활약상만 드러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미국)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 영국·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실감나는 전쟁장면의 재현은 놀랍지만
교묘한 포장은 여전하다. 미국인이 말하는 인간애의 대상은 미국인에게만 국한된다. 미국인 한 명의 생명만 못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간다.
상처는 남는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 영화도 분명 존재한다.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기도 한 미국의 대표적 반전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은
7월4일생(1989 미국)에서 보수적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숭고한 젊은 영혼들이 희생됐는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참전을 명예로운
행동이라며 부축이던 그들이 모든 걸 잃어버린 희생자들을 외면하고, 민간인 학살, 오발 사고 등 자칫 전쟁의 정당성을 깨뜨릴 사안들을 묻어버린다.
남성성을 잃어버렸다며 절규하는 톰 크루즈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생식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이자
어린날의 꿈이다.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꿈에 대한 향수는 버디(1984 미국)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실제로 자신의 이를 망치로 치는 등
전무후무한 연기를 펼친 이 영화에서 새처럼 웅크린 버디(매튜 모딘)의 모습은 전쟁의 후유증과 빼앗긴 꿈에 대한 집착을 상징한다. 정신병에
걸린 버디와 그를 치유하려는 알, 둘은 모두 상처입은 영혼이다.
참전 군인의 희생에 초점을 맞춘 두 영화와 달리 좀더 범위를 확장시킨 영화로 후세인의 미친 노래(2001 미국)를 들 수 있다. 단 6주만에
첨단무기를 동원해 다국적군의 승리로 끝난 걸프전 직후, 이집트인 남편의 ‘후세인’ 성 때문에 인종적 차별과 학대를 당하고 급기야 아이들을
잃어버린 페르난다, 걸프전 발발 후 학내 반전운동에 적극 가담한 이유로 가족과의 끊임없는 불화를 겪는 라파엘, 참전하고 돌아온 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카를로스, 이렇게 3명의 희생자들의 모습을 통해 상처는 전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이에게
남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상흔은 겉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즉 마음에 더 크게 자리한다.
STOP THE WAR!
전쟁에 관한 진실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처음 살인(2002 네덜란드)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입을 통해 살인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반인륜성을 고발한다. 퇴역 군인 빌리 헤플린은 전쟁을 혐오하지만 살인에 중독돼 때로는 전쟁을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다른 군인들도 베트남에서 저지른 끔찍한 학살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전쟁에서 그들은 살인에 대한 악마적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파나마 사기극(1992 미국)은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파헤친 다큐멘터리다.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미국은 그
나라의 통치자를 자신의 앞잡이로 내세워 강하게 하지만 보이지 않게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파나마의 대통령 노리에가가 반우호적이자 미국은
마약밀매라는 누명을 씌우고 세계정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개입하는 척하며 노리에가를 체포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됐지만 언론은
이를 감추고 권력자들과 밀착하여 그들의 말만을 반복한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미 정부와의 협력 하에 정보를 검열하고 국민들을 어떻게 속였는지
방법과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마치 어떤 전쟁과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본 악마들(2000 일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루타’로 너무나
잘 알려졌고 직접적 피해를 입은 생체실험과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끔찍한 방식으로 학살한 죄악들이 담겨졌다. 자신들이 저지른 패륜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미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때문에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하려해도 미국적 시각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거의 모든
영화들이 가해국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피해국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 자칫 동정어린 감상주의로 몰아갈 수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으로 전쟁의 본질을 생각해보고,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왜곡도 과장도 없이 진실되게 표현한 영화가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