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성훈 기자] 올 연말께 결혼을 앞둔 직장인 A씨(33세·남)는 최근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전셋짒을 구하려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매물을 보여 달라고 하니 기존 세입자가 '5만원'을 내라고 한 것이다. 다른 세입자는 여러 번 집을 보여주기 번거로우니 중개업소에 집을 보기 원하는 사람 모두를 모아 오라고 통보했다.
A씨는 이보다 더 놀라운 경험도 했다. 실제로 매물이 나오자마자 23분 만에 계약이 된 것이다. 매물을 보지도 않은 '묻지 마' 거래였다. 결국 A씨는 직장과 가까운 광진구를 포기하고 경기도 분당에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층간소음을 견딜 수 없어 이사를 결심한 손희재씨(40세·여)도 최근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세입자가 집에 없어 방문이 불가하다고 해 집 주변을 둘러보러 갔는데, 태연히 창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있는 세입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미 3차례 넘게 집을 보여주지 않았던 터라 손씨는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집 내부를 보지 않고 전세계약을 체결했다. 손씨는 "사내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1층만 고집하고 있는데, 매물이 없다"며 "전세를 구하는 사람이 '을'인 줄 알았는데 '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10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수도권 지역의 전세난이 가중되면서 기존 세입자들이 매물을 고의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핑계로 세입자가 또 다른 세입자를 등한시하는 이른바 '역갑질'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재확산하면서 남을 집에 들이는 것이 우려스러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굳이 시간을 할애하면서 노력하지 않아도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이 이렇게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통계로 확인된다.
KB국민은행 리브온에 따르면 지난달 수도권 전세수급지수는 184.4로 2015년 전세대란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00을 넘길수록 전세물량 부족이 심각한 것을 의미한다.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185.4로 집계됐고 경기는 이보다 높은 185.9로 나타났다.
여기에 정부가 사전청약 입지와 일정을 발표하면서 전세수요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 8일 하남교산, 인천계양, 부천대장, 고양창릉, 남양주왕숙 등 3기신도시의 사전청약 내용을 발표했다.
전세시장이 들끓는 이유는 청약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지역에 직접 거주해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택 공급 우선순위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의무거주 기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실수요자들은 일찍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매물을 보지도 않고 전세계약을 하는 '묻지 마' 거래가 행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전세계약을 중개하는 공인중개사들은 난감한 입장이다.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영업하는 한 공인중개사는 "세입자가 집을 안보여주면 그만이다"라며 "최근에는 집을 보여주기 싫다며 알아서 계약을 하라는 세입자도 있었다. 세입자의 '갑질'이 이렇게 무서워질 줄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서울 성동구에서 영업 중인 한 공인중개사 역시 "오래된 집들이 많아 전세를 구하는 세입자들은 집 내부를 보고 싶어 하는데 볼 수가 없다"며 "부동산에 손님을 앉혀놓고 '통화가 안 된다'는 말만하는데 매우 난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