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칼 하나로
세상을 치유한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민족성 담아내는 목조각장 박찬수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풍경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입구의 미륵삼존불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마중했고,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범패는 마음의 고요를 선사했다. 경기도 여주의 목아불교박물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박물관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색다른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색다른 공간에 더 색다른 사람이 머무르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108호 목조각장이자 이곳의 관장인 박찬수(55) 선생이 바로
그다.
명상적이면서 해학적인
박 선생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도사였다. 검은 도복하며 상투 틀 듯 동여맨 머리,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유난히
검은 눈동자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첫인상과 달리 그의 웃음은 너무나 순박해서 보는 이도 따라 웃게 만들었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순간순간
그 사이를 오가며 개성을 발산하는 그의 매력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미술평론가 최태만 씨는 “차분하고 명상적이지만 한편으론 해학적이고 익살스럽다”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아우르고 있는데 특히 나한상과 동자상에서 두드러진다.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 나한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귀를 파는 모습이나 경전을 읽으며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성인이면서 범부의 모습을 갖췄다.
동자상에 나타난 표정은 평온한 듯 하면서도 장난끼가 가득하다. 동자를 묘사한 작품은 유난히 많았는데 “모든 종교가 어린이의 심성을 닮는
것이 근본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곱 살이 지나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애욕’의 감정이 생깁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겁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가
인간사에서 가장 순수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박 선생은 덧붙여 “마음에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심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미얀마 대통령과 스님들이 박물관에 방문해서는 깜짝 놀라신 적이 있습니다. 벌거벗은 여자상 때문이었죠.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즉 벗는 것이 아니냐고 해명했습니다.”
한국적 기반 위해 변형 추구
박 선생이 조각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 12살 때 조각가 김성수 선생의 작업실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잔심부름을 했는데 원체
재주가 있던 터라 어깨너머 배운 것이 제자들보다 앞서기 시작했다. 그의 실력을 인정한 김 선생은 현재 강원대 미대 학장으로 있는 이운식
선생을 소개해주었고 그로부터 본격적인 조각 이론과 실기를 교육받게 됐다.
“아마 두 스승의 가르침과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 목조각장의 길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982년 제1회 단원예술제에서 삼존불상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89년 제14회 전승공예대전에서 통도사 적멸보궁 법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최초의 목조각장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조각가’라는 닉네임도 얻었다. 그러나 박 선생은
불교조각가로만 한정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불교적 색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는 모든 주제와
양식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불교조각이 섬세하기 때문에 주로 작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국한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만 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품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에 대한 애착은 유달라서 우리 한민족의 정신성을 작품에 담으려는
시도가 역력하다. 박물관 입구에 서있는 미륵삼존불이 장승의 형태를 발전시킨 형상인 것만 봐도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뿌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국적 기반 위에 변형을 가했을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작품이 탄생합니다. 제가 불교에 심취하는 것도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한 방법이지 다른 종교나 사상을 배타하면서까지 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예술이란 그리고 종교란 벽을 걷어내고
인간과 인간의 교류를 통해, 조화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니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는 근본적으로 자연인이었다. 열린마음과 깨인 생각으로 무장한 태고적 ‘인간’이다. 또한 그는 술과 음악, 춤도 곧잘 한다고 자랑했다.
“술을 마실 때는 마음 속 고민을 모두 떨어버리고 즐겨야 한다”며 “음악과 춤은 누구에게나 천부적 소질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작업도구인 막대기로 즉흥적 연주를 시작했다. 장단을 만들어내면서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그의 몸짓과 표정이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었다.
‘살아있음’. 그것이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나무결의 살아있는 느낌과 조각가의 숨결이 칼자국으로 드러나는 목조각 세계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두드리는 연장소리를 음악으로 여기고 조각행위를 춤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예술이 사람의 정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유물과 자신의 작품 5,600여 점을 모아 많은 이들이 감상하고 명상할 수
있도록 목아박물관을 설립했다.
한편 그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박물관 내 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있으며
1995년부터 매년 어린이 그림그리기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그가 장승을 조각하면서 장단을 만들어내면 그 소리에 맞춰 무용수가 춤을 추는
퍼포먼스도 여러차례 가졌다. 작품으로, 교육으로, 공연으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발산하고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각을 한다”는 그는 다시 작업실로 되돌아갔다. 이번엔 또 어떤 작품으로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할는지
궁금증이 앞섰다. 종교를 떠나서 방문객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신기한’ 목아박물관에 부드러운 바람이 감쌌다. 풍경소리가
세상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