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일기장을 펼치는 듯한 설레임
평범한 기억 속 단편 ‘덜렁이’
흔히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면 수십 권의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한다. 매순간 기쁨과 환희, 슬픔과 분노를 겪으면서 각자의 인생은
한편의 소설로 완성된다. 1920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우리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했고, 이제는 갑자기 찾아온 저시력증으로 평생하던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된 김성순 할머니의 넋두리는 평범하지만 드라마틱하다. 한 권의 책으로 형상화된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는 평범한 인간의 삶이자 우리네
이야기다.
지나온 인생에 대한 반추
올해로 84세, 게다가 저시력증인 김 할머니는 너무나 어렵게 이 책을 썼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상태. 또한
쓴 글을 읽을 수 없는 할머니는 쓰다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어디까지 썼는지 알 수 없어 다시 처음부터 써야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되내이며
담아낸 글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활동사진처럼 풀어진다.
한 가족으로 살다 떠나보내야만 했던 진돗개 덜렁이, 사춘기 여고시절 친동생처럼 아껴주던 에스언니 정애, 피난길에서 만난 따뜻한 이웃들,
시대는 다르지만 누구나 한번쯤 만나보고 경험했을 사연들이 공감대를 이룬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에서 오는 연륜은 젊은 세대가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미덕으로 곳곳에서 발산된다. 59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의 죽음. 가장
애통했을 그 순간을 김 할머니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킨다.
자리에 누운 지 1년째 되는 어느 날, 남편은 아내의 팔을 안마해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 오라고 해”라고 말했다. 자녀들이 오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60년 동안 둘만의 비밀로 삼았던 연애시절 수줍은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남편은
권하는 귤 몇 쪽을 달게 먹으며 영원히 잠이 들었다.
김 할머니는 ‘죽었다’는 표현을 어느 구절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이별’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할머니 자신도 이제는 이별할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5년을 함께 지내온 손때 묻은 싱거 재봉틀에 대한 연민은 그러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년째
사용되지 못하고 한쪽 구석자리에 놓여있는 낡은 재봉틀은 할머니의 분신이다. 열심히 옷을 만들며 돌아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재봉틀처럼 할머니는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투박한 문체 친밀감 생성
책의 마지막은 김 할머니 자녀들의 글로 장식됐다. 그들은 어머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추억거리를 만들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들이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은 어머니에게만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 나이가 됐을 때 과거를 회상하며 떠올릴 기억의 한 자락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지금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낄 것이다. 또 그들의 자녀도 그럴 것이고 그 다음 세대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네 이야기다. 시간은 흐르지만
비슷비슷한 경험과 감동은 끊임없이 연결된다.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와 투박한 어투, 문장의 어설픔은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어릴
적 자신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설레임이 느껴진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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