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당한 시대, 부조리의 80년대
새로운 한국적 스릴러, 연쇄살인실화극 ‘살인의 추억’
86아시안게임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첫 사건을 시작으로 무려 6년간 10명의 희생자를 내며 전국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살인의 추억’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악몽으로 남은 이 뼈아픈 사건의 기억을 조목조목 고통스럽게 되새기는 영화다.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기 보다 당대의 사회상과 인물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스릴러나 형사 버디무비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성을 견지하며 장르적 관습을 무너뜨린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른 두 형사는 의기투합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헐리우드와는 다르게, 절망과 광기에 빠지며 서로를 닮아간다. 멋진 액션이나
고도의 두뇌게임, 퍼즐 맞추기의 재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너무 빨리 잊혀진 ‘추억’이 살아나 아프게 생채기를 파고든다.
서로 동화되는 상처투성이의 인물들
영화의 주축은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사건 최전선에 있던 형사들의 희로애락이다. “얼굴 보면 딱! 삘이 온다”는 박두만(송강호)은 소문과 느낌으로
용의자를 지목하는 육감파 시골형사다. 반면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서태윤(김상경)은 데이터를 분석해 범인을 추리하는 두뇌파 서울형사다.
두 형사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티격태격하지만, 미치도록 범인을 잡고 싶다는 공통된 열망과 잡히지 않는 범인과의 고달픈 싸움은 그들의 경계를
흐린다. 계속되는 처절한 범행과 일선 형사의 무능을 지적하는 언론의 비난 등에 지치면서 그들은 점차 혼돈에 빠진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 마을 전체를 뒤덮고 인물들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과학수사가 사건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던 서태윤은 결정적 용의자에게서 마땅한 증거를 찾을 수 없자 “증거가 무슨 필요 있어. 잡아 족치면
되지”라고 외치고,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던 박두만은 오히려 폭력을 포기한다. 근대와 전근대의 사고가 뒤섞인 과도기. 불합리한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그 어떤 개인의 사고나 의지도 무력하기 짝이 없다.
거침없이 용의자를 발길질하던 조용구(김뢰하) 형사는 용의자였던 백광호(박노식)가 내리친 강목에 박힌 못에 찔려 파상풍으로 다리를 절단한다.
가해의 ‘도구’가 피해자의 가해에 의해 잘려나가는, 이 상처투성이로 범벅된 아이러니한 상황은 80년대가 폭력과 광기, 부조리로 썩어 가는
절름발이 시대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봉준호 특유의 디테일한 표현, 송광호의 완벽한 연기
과학적 수사 시스템이나 기술은 드라마 ‘수사반장’에서나 존재했고, 시시때때로 민방위 훈련을 시행하면서도 한 명의 시골 부녀자 목숨에는 정작
무관심했던 허상과 거짓의 시대. 경찰조직과 공권력은 시위 진압과 반정부세력 타도에 투입되어 민생치안은 돌볼 겨를이 없었던 불행한 사회상은
탄탄한 드라마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동안 복고로 달콤하게 포장돼왔던 80년대에 대한 판타지를 걷어치우고, ‘살인의 추억’은 개도국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사실은 후진국이었던
이 땅의 서글픈 과거를 직시한다. 봉준호 특유의 디테일한 표현에 빛을 더한 송광호의 시골형사 연기는 ‘완벽’이라는 극찬이 아깝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김상경, 박해일, 변희봉, 송재호, 김뢰하, 박노식 등의 노련한 연기 또한 영화에 상당한 에너지를 공급한다.
‘살인의 추억’은 무섭고도 슬프며, 초조하면서 허탈하고, 웃기면서 씁쓸하다. 감독은 80년대 자체를 부조리하고 아픈, 동시에 몰상식과 조악함이
쓴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로 회고한다. 시대적 공기를 독특한 정서와 날카로운 눈으로 포착한 정치적 스릴러, 또는 새로운 한국적 스릴러인 ‘살인의
추억’은 ‘지구를 지켜라!’ ‘질투는 나의 힘’과 함께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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