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정책… 차(車)업계 ‘희비’ 엇갈려
현대·기아차는 울고, GM대우·르노삼성차는 웃는다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이 산업계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경유승용차 허용이나 경차 규격 확대 등의 자동차 정책을 수시로 번복함에 따라 자동차 산업계가
혼선을 빚고 있다.
경유차 허용 논란
정부는 지난 3월 말,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2005년부터 유로-3(유럽의 현행 오염물질 배출 허용기준) 기준의 경유승용차 도입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현행 국내 경유 승용차의 배기가스 허용기준은 워낙 까다로워 허용기준을 완화하기로 했던 것이다. 현행 배출기준은 유럽연합(EU)의
경유승용차 배출기준인 유로-3에 비해 미세먼지 25배, 질소산화물 12배 등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경유승용차 국내 판매는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에서다. 이로써 자동차업계와 산자부, 재경부 등은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무리한 저감대책 추진으로 인한 부작용 등을
고려해 경유승용차 허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경부는 지난 12일, 경유 승용차의 2005년 국내시판을 골자로 한 유로-3, 유로-4 수준의 제작차 배출허용안을 포함시키지 않은
채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을 입법예고했다.
이같은 결정에는 환경부가 연내에 제정할 예정이던 ‘수도권 대기환경 개선에 관한 특별법’과 관련, 산자부 등과 협의에 진척이 없자 ‘협상용’으로
강경한 법규를 제시했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산자부가 경유 승용차 도입의 전제조건이던 ‘경유가격의 인상’이 정책결정과정에서 흐지부지 됐기
때문.
당초 경유차 허용문제에 관해 환경부는 “경유다목적차(RV) 등 제작차 배출 허용기준, 운행차 관리, 경유 중 황함량 기준 강화 등 경유차 전반에
관한 대기질 개선 대책도 병행해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경유승용차 허용으로 인한 추가적인 대기오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환경단체와 환경부 등은 경유차 국내 도입이 허용되면 대기오염이 악화될 것으로 보고 휘발유 가격의 58%수준에 불과한 경유차를 2006년까지
85%까지 끌어올려 경유차 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협상용’ 입법예고는 환경부 발언으로도 짐작될 수 있다. 환경부는 “앞으로 경제부처간 협의를 통해 수도권 대기환경 개선에 관한 특별법 제정,
에너지 상대가격 조정 등에 관한 사항이 가시화되는 대로 경유승용차 기준을 포함한 차기 제작차 배출허용기준에 대한 추가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산자부 등은 휘발유와 경유, 액화석유가스(LPG)의 가격을 2006년까지 100:75:60으로 개편키로 한 상태에서 가격 체계를 재조정한다면,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우려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환경부는 이번 입법예고안에 대해 6월말까지 개정·공포할 계획이다. 이로써 경유승용차
허용문제는 찬성하는 산자부와 이에 맞서는 환경부간의 마찰로 답보 상태에 있다.
하지만 경유값 대폭인상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휘발유차와 경유차는 오염물질 종류만 다를 뿐 대기오염을 시키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유럽에서는 경유차가 휘발유차보다 연비가 20~30% 싸 에너지 절약에 도움이 되고 오염물질도 적게 배출돼 경유승용차 보급을 확대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경차 규격 확대 논란
경차규격 확대 방안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상반기에 관련법 개정을 마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예기간을 3년으로 발표했던 정부가 일부
반대여론이 일어나면서, 슬그머니 시행시기를 5년으로 연장했다. 김진표 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GM 대우차의 협력업체들과 인천 경제계가
5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건의하고 있어 시행시기를 다소 늦추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경차보급활성화 추진 시책으로 △공채매입의무 면제(지하철 지역 4%, 기타지역 1.5%) △자동차세 인하(80원/cc→이륜차수준(22.5원/cc)
△공영주차료할인지역 확대 등의 유인책을 강화하고, 경차의 규격확대를 위해 배기량을 800cc→1,000cc/너비는 1.5m→1.6m로 늘리고
3년간의 예고기간을 부여하고 규격확대시 중량 및 크기 증가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한다는 등의 내용을 내놓았다.
환경부는 현행 휘발유가의 50% 수준인 경유가를 85%로 인상하는 것을 경유 승용차 도입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산자부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계없음) |
업계, 향후 투자 및 개발에 큰 차질
이처럼 정부가 정책결정에서 ‘오락가락’ 하자, 자동차업계는 향후 개발 및 투자 등 대책 마련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술렁거리고 있다. 업체간에도
희비가 엇갈려, 특정업체 특혜가 있었던 건 아니냐는 불만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오는 2005년 경유승용차 판매 허용과 경차 규격확대를 예상해 투자와 기술개발을 진행해 왔다. 2005년 경유 승용차가 허용될
경우, 최대 수혜자는 현대·기아차. 이미 유로3형 경유 엔진을 탑재한 베르나 아반테 XD 경유승용차를 수출하는 등 국내에선 유일하게 소형부터
중대형까지 경유 승용차 엔진을 갖고 있었고, 당장 내년 초 유럽형 경차인 ‘SA’의 국내시판도 눈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현대·기아차는 “정부 정책의 혼란으로 업계만 피해를 보게 됐다”며 “경유승용차 국내 판매가 허용되지 않을 경우 업계 전반의 수출 경쟁력도 크게
저하될 수 밖에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또 “이미 정해진 정책방향이 뒤바뀌는 것은 정부의 무원칙과 무소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반면, 2006년 유로-4 기준 도입을 요구해 온 GM 대우차나 르노삼성차 등 후발업체들은 관련법 시행 연기에 내심 반기는 입장이다. 마티즈
후속모델인 ‘M-200’개발을 잠정 중단했던 GM대우차는 경차 경유차 문제가 유리하게 작용함에 따라, 로비력을 한층 강화하는 태세다. 그동안
2명에 불과했던 대관업무 인력을 이달 내 4~5명으로 확충하기로 한 것. GM대우차는 “유예기간 연장에는 환영하지만 정부가 정확한 시행시기를
하루 빨리 밝혀야 향후 경차 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다”면서 “환경부가 아직 경유차 배출가스 허용기준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부적인 투자계획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미 결정된 정책이 환경단체와 지방단체, 일부 자동차업체의 반발을 의식해 다시 바뀐다면 기업들이 어떻게 장기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겠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또 “경유승용차 판매문제는 EU와의 통상마찰문제와도 연관이 있다”면서 “한국 경유승용차는 유럽에 수출하면서 유럽차는 국내에 판매하지 못하게
한다면 통상문제가 일어나고 국내 기업들만 골탕을 먹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GM대우차는 “오는 2006년 유로-4 수준의
배출기준을 적용해 경유승용차 판매를 허용해도 늦지는 않다”고 맞서고 있다.
정유업계도 혼선을 겪기는 마찬가지. 경유차 배출가스 허용기준은 다루지않은 채 경유 황함량을 대폭 낮추기로 해, 어느 정도로 탈황시설 투자를
해야할지 감을 못잡고 있다. 정유업계는“자동차 시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연료에 대한 규제치만 나와 있다”며 시설투자 규모 및 자금동원
계획 수립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이에 특정기업이나 특정 이익단체의 목소리가 너무 과도하게 반영되지 않도록 정부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홍경희 기자 khhong04@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