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떠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통일에 대한 코믹한 풍자, 날카로운 지적 ‘조통면옥’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20대
후반 이후 세대라면 울컥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목청껏 이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악랄한 북한공산괴물로부터 고통받는 한민족을 구출하고,
동강난 우리나라를 하나로 다시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노력했다. 자유를 수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남한은 정말로 무진장 노력했다. 그런데 왜 북한은 잠잠해졌다하면 간첩을 내려보내고, 잊었다하면 잠수함을 내보내는 것일까? 기다리고 기다리는
통일이 오지 않는 건 순전히 북한 때문이다.
북한은 쥐새끼다.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응큼한 쥐다. 그런데! 다시 눈을 부릅뜨고 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누가 쥐인지…
쥐새끼, 정체를 밝혀라.
극단 차이무의 ‘조통면옥’은 매우 재밌고 웃기는 연극이다. 분계선의 어느 비밀스런 지점에 자리한 냉면집을 배경으로 시종일관 희극적 요소가
관객을 즐겁게 한다. 냉면집 종업원이자 귀순처녀 옥화가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부르는 힙합, 트로트, 블루스, 락 버전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신명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배경이 된 냉면집은 사실 ‘조통면옥’이라는 위장간판을 내걸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비밀통로를
안내하며 떼돈을 버는 은밀한 공간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사장 우보와 비밀통로를 제공하는 북한 공작원 깁산, 1급비밀임무를 띄고 북한에 가려는
남한 고위간부 평원, 그리고 북한에 땅을 사러 가는 재벌2세 보영이 중심인물이다. 또한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이 바로 막 중간마다 등장하는
쥐새끼들이다. 빨간불빛을 들고 무대 여기저기를 훑어 다니는 쥐들은 “찍찍” 소리를 내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들의 호기심이 극대화
됐을 때 비로소 그들의 정체는 밝혀진다. 기대하시라!
희생양이 된 ‘통일의 진달래’
옥화는 우보와 깁산의 일이 조국통일을 위한 위대한 사업인 줄만 알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노래하고, 수비대 사령관들에게 몸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과 몸을 섞으면서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지레를 제거한다. 비밀통로의 안전과 배 위에 있는 사령관의 안위를 위해서다. 옥화의
몸은 제의적 공간의 표상이다. 그녀의 몸을 거치면서 타락한 영혼들은 죄씻김을 받는다. 시련은 옥화가 겪고 재생과 구원은 나머지가 받는다.
희생양을 통해 다수가 구원받는 시대의 폭력이 일어난다.
진달래꽃은 옥화를 상징한다. ‘즈려 밟히고’(김소월詩),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은’(이영도詩) 진달래를 닮았다. 그녀는
자신을 ‘통일의 진달래’라 일컫는다. 즉, ‘통일의 희생양’인 것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말하듯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관객을 거북하게 한다. 순결했던 처녀가 이쪽저쪽에 몸을 바치고 잠자리를 해야했던
이유는 분명 불편한 이야기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녀가 하필 어린이를 대상으로 이야기한 것은 순수함에 대한 보상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또한 자신의 희생으로 다음 세대에게 통일의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소망이 컸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옥화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 통일을 바라는 이들은 없다. 우보, 깁산, 평원, 보영은 통일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이러다
정말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걱정한다. 그들은 평화무드를 깨기 위해 잠수함 남파 계획을 짜고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 세
개밖에 없는 의자를 두고 자리뺏기 싸움을 하는 모습이나 조명이 비추는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 밀고 밀치는 모습은 ‘통일’이라는 명제
하에 벌어지는 이권 다툼을 상징한다.
무대 중앙에 걸린 ‘통행료 일제 반액 대매출’이라는 간판 또한 그들의 속마음을 대표한다. 통행료의 50%만 받는다는 구호가 각 어절의 대표음절에만
불빛이 들어오면 ‘통일반대’가 된다.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모습이다.
희극을 표방한 비극, 어퍼컷 한방!
연극은 ‘햇볕정책’을 ‘달빛정책’으로, ‘통일 소’를 ‘닭 떼’로 희화화시킨다. 본질을 잃어버린 변질된 정책에 대한 풍자다. 더불어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 위해 거추장스런 자격요건들이 왜 필요한지 의문을 던진다. 50년을 기다린 할아버지가 자격조건 미달로 ‘조통면옥’을 찾아오는
장면은 통일사업이 진정 누구를 위한 사업이냐고 생각게 한다.
드디어 북한에 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한걸음을 떼어 논 노인은 그렇게 그 자리에 굳는다. 걷는 모습 그대로 죽는 설정은 통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극대화시킨 표현이다. 그들은 죽은 노인을 최상의 비밀통로를 통해 북한땅에 보낸다. 노인을 눕히고 굳은 다리와 팔을 올곧게
펴주는 의식절차를 거쳐 정성껏 그리고 숙연한 장례식이 거행된다. 그리고 옥화도 노인을 따라 북으로 떠난다.
통일을 간절히 바라던 유일한 두 명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네 명은 조용히 무릎 꿇고 애도한다. 침묵이 흐르고 관객도 감동을 받을 즈음 낄낄대는
웃음 뒤로 불이 꺼지며 쥐새끼들이 다시 등장한다. 조명이 켜졌을 때 드러난 쥐새끼의 정체는 바로 그 네 명이다. 연극은 관객을 향해 어퍼컷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적중했다.
막간 사이에 나온 쥐들의 출현은 관객의 호기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찍찍 소리에 재밌어하고, 그 소리를 따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대가는 너무나 당혹스럽다.
‘조통면옥’은 희극이다. 아니 비극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다. 아니 진실이다. 눈을 크게 떠라. 그러면 웃음 안에 눈물이
보일 것이고, 세상에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요란한 사이키조명에 묻혀졌던 옥화의 간절한 통일노래가 다시 들릴 것이다.
·문의: 6월29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02-762-0010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