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함에 따라 관련 국가들간의 입장이 엇갈리게 나타나고 있다. 6자 회원국 가운데 일본 등은 노골적인 반발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중국은 ‘북미 관계 개선에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로 인해 겉으로는 환영한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지만 속사정은 매우 복잡한 듯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하며 추진해온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번 북·미 합의안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10월13일 브리핑에서 “대북사업의 재조정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북핵문제 진전에 발맞춰 남북관계 발전을 추진한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에 강한 불만을 표하고 있는 일본내 언론 등은 ‘북한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핵보유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 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거론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시 행정부 외교적 성과 노려
미국 대선을 20여 일 앞두고 부시 미 행정부가 10월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다는 특별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내부 대북 강경파를 의식한 듯 숀 매코맥 대변인과 성 김 북핵 특사 등만 참석한 가운데 핵검증 합의 내용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뒀다. 여기에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놓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움직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련 가능성을 보인 것은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10월3일 북한에서 돌아오면서부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 방문 당시 테러지원국 해제 등에 대한 합의가 사실상 끝났지만 함구로 일관하다가 10월9일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각국 물밑 협상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것이다. 나카소네 히로후미 일본 외상은 10월10일(미국시간) 오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전화 통화를 통해 신중한 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련 일본의 격한 반발로 인해 미일관계가 복잡하게 흘러가자 부시 대통령이 아소 다로 일본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납북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일본측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미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해제에 나선 것은 북한의 핵프로그램 재개를 차단하고 임기 중 외교적 성과를 이루겠다는 의지로 풀이되고 있다. 미 부시 행정부가 집권 초기에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면서 강공을 펼친 결과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북한이 핵개발은 물론 핵실험까지 강행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2009년 1월로 임기가 끝나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북한 핵불능화라는 2단계 목표 달성의 동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 반발이 변수로 작용
미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을 해제하면서 각국 언론 등에서는 6자 회담에 대한 긍정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으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북핵 문제와 관련 주요 쟁점이 북미 양자협상에서 논의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일본 러시아 등 관련국들이 들러러로 전락하는 모양새를 띄고 있다.
그동안 6자 회담의 동력으로 북한을 6개국의 ‘다자합의’에 묶어둔다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주객이 전도돼 북미 양자협상 결과에 대한 6자회담이 추인하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10월14일 “북미 양자 간의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보다 안정성을 가질 수 있는 6자회담이 만들어 진 것”이라며 “그러나 북한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동결과 테러지원국 해제 등 미국과의 양자 이슈를 빌미로 수시로 6자회담 합의 이행을 미뤄 다시 북미 협상이 주요 채널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즉 미국이 6자회담 진전을 위해 북한과 직접협상에 나섰으나 이것이 역으로 6자회담을 위태롭게 만든 셈이 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측으로서는 일본인 납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의 지렛대가 상실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케이신문 구로다 서울 지국장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로서는 미일 동맹관계 등으로 인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여론 자체는 아주 부정적”이라며“일방적으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은 일본의 대미 외교에 대한 실패로까지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일본내에서는 미일 동맹관계의 경우 서로 도와주는 것이 동맹이지 일본의 핵심적인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해결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며“특히 총선을 앞두고 있는 아소 수상 입장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구로다 지국장은 “북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는 3단계인 페기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북한이 시간끌기 전술로 나오면서 미국으로부터 결국은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받으려 할 것”이라며“일본도 이에 대한 미국의 일본에 대한 안전보장 등 다각적인 방어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 소외 가능성 제기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따라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이 주목되고 있다. 정부가 북핵 문제의 진전을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남북 관계 개선에 필요한 논리적 명분은 마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남측의 의지에 달렸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로 대남 관계에 여유가 생겨 ‘통미봉남’의 전략을 더욱 거세게 몰아 붙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최근 6.15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 이행에 대한 남한의 입장 변화가 없을 경우 개성관광 중단 등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남북관계의 대응책을 마련하겠다는 ‘으름장’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남북관계 진전에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해온 정부의 의지에 따라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선도적 대북정책을 펼치겠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정부는 비교적 접근이 쉬운 식량 문제에서 실마리를 풀겠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세계식량계획(WFP)에서 11월까지 2000만~6000만 달러어치 지원을 요청해 왔다”며 간접적인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와함께 선도적 대북 구상의 중심에 있는 3대 경협사업인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와 개성공단 실무협의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공성진 최고위원은 10월1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정부의 역할이 충분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등 여당 일각에선 북미 합의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소외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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