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을 자극하는 맛있는 비빔밥!
익숙한 줄거리 하지만 색다른 감동, 런던팀 내한공연 뮤지컬 '시카고'
지난
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8월3일까지의 일정으로 뮤지컬 '시카고'의 막이 올랐다. 이번 공연은 런던팀 내한공연으로 '원조'라는 최고의
매력적 타이틀을 내걸어 뮤지컬 마니아들의 기대는 더욱 뜨겁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 6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시카고'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2000년에 인순이 최정원 주연으로 올려진 바 있어 '알만한 사람 다 아는' 이야기를 얼마나 다르게 표현했을까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다.
1920년대 음울한 미국의 뒷골목
뮤지컬 '시카고'는 헐리웃영화의 단골 배경이기도 한 1920년대를 배경으로 미국의 음울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을 끈적거리는 재즈선율에 녹여냈다.
살인과 간통, 부패와 배신, 그리고 팜므파탈의 모티브를 위트 있는 가사와 흡입력 있는 멜로디, 관능적 안무로 적절히 표현해, 1975년부터
지금까지 손꼽히는 뮤지컬 중의 하나다.
불륜을 저지른 자신의 남편과 여동생을 살해한 보드빌 배우 벨마 켈리, 자신을 차버린 정부를 살해한 록시 하트, 두 여자가 돈과 특종을 쫓는
변호사와 언론을 이용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스타가 된다는 줄거리로 매스컴과 여론조작을 비꼬는 풍자성이 짙다.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시카고'는 특수성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보편성을 지녔다.
하지만 무죄 판결을 받고도 신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고 슬픔에 잠기는 록시의 모습이나 타락의 중심부에 있는 벨마가 세상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는 모습 등은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기에 조금 무리가 따른다. 또한 극단적 방법인 살인을 통해 여성해방을 추구한다는 것도 억지스럽다.
그러한 설정 자체가 신랄한 비꼬기와 비웃음을 위한 내러티브라 할 지라도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용임엔 분명하다.
배우들의 기량으로 승부
무대는 재즈 밴드의 연주석이 전면을 꽉 채우고 단 한번의 세트 변화 없이 사회자의 설명이나 작은 소품만으로 장면을 상상토록 유도했다. 배우들은
연주석 앞 쪽 좁은 공간을 오가며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데 무대가 다소 좁게 느껴져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무대 자체의 화려함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대를 축소시킨 대신 배우들의 춤과 노래는 매우 현란하고 관중을 압도하기 충분하다. 배우들의 기량만으로 승부를 내건 것은 타 공연과
가장 차별화된 특징. 특히 벨마 역의 리사 돈멀은 안정된 춤과 노래 실력을 여과 없이 발산한다. 흔들림 없는 고음과 익살스런 목소리는 그녀의
매력 속으로 흠뻑 젖어들게 한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배우들의 연기력이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단연 록시와 변호사 빌리의 인터뷰 장면. 빌리에게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록시는 무체관절인형을 연상시키고, 두 배우의 호흡은 완벽하다. 극의 주제를 함축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매우 인상깊게 연출했다.
야시시한 속옷 바람으로 등장한 배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벌의 옷으로 1인다역의 역할을 소화한다. 기존 연극이나 뮤지컬이 한 명의 배우가
다른 배역을 소화할 때 전혀 다른 의상과 말투로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다면 '시카고'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것은 연기다'라고
까발린다. 어차피 자신들은 배우고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용들은 꾸며진 이야기라고 드러내는 것이다.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내용을
가벼운 쇼의 형식을 빌어 관객이 거리를 두고 즐기게 하기 위함이다.
재즈 바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
때문에 관객들은 시카고의 어느 재즈 바에 앉아있는 착각에 빠진다. 꾸며진 이야기를 또 한번 재즈 바의 보드빌로 각색한, 소설로 말하면 액자구성처럼
무대 위 무대공연이 펼쳐진다. 사회자가 직접 다음 곡을 소개하거나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거는 행동은 더욱 이러한 성격을 도드라지게 한다.
재즈 오케스트라 단원이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애드립도 쇼의 형식을 부각시킨다. 단순히 음악만 연주하는 보조적 역할에서 연기도 펼치며
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는 재즈 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출연진으로 부상한다.
뮤지컬이 음악과 춤의 절묘한 비빔밥이라면 '시카고'는 윤기나는 밥과 갖은 나물들을 적절히 배합해 손님에게 내놓은 훌륭한 비빔밥이다. 거기다
'사랑 놀음'에서 벗어난 육중한 주제의식은 맛깔스런 햇고추장으로 작용해 단맛에 길들어진 관객의 혀를 강하게 자극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맛있게 비비는 일이다. 이것은 관객의 몫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여린 목소리로 열창하던 여기자 메리 선샤인이 마지막에 남성으로 밝혀지는
것처럼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내놓은 반찬을 제대로 비비지도 않고 먹지 말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골고루 잘 비벼 가장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숟가락을 들자. 눈과 귀가 즐거웠다면 머리와 가슴도 즐겁게 하자. 흥겨운 쇼에도 날카로운 비판과 문제의식이 담겨있으니!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