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 위험, 무서움, 두려움이다. 섬뜩한 칼날에 대한 공포는 칼을 가까이 해서는 안될 위험천만한 ‘무기’로 인식하게 하고 영화에서 봤던 절대 악을 무찌르는 보검의 신성성이나 영험성은 아주 옛날 그랬을지도 모를 전설이며 허구로 다가오게 한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검들은 고대에는 사냥이나 전쟁에 유용한 도구였겠구나 하는 해석만 들게 할 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 적어도 나에겐 그리고 그를 만나기 전까진….
1,500여년의 침묵을 깨고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됐을 때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었다. 금관과 각종 장신구 등 많은 부장품들이 피장자 주변에 놓여있던 것과 달리 칼만은 피장자 왼쪽 허리에 부착돼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장식품 중 왜 유독 칼만이 주인과 함께 했을까?
20여년간 전통도검을 복원·재현하고 있는 홍석현(51) 씨는 그만큼 칼이 주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고 그 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칼이 무덤 주인의 신분증명서 역할을 담당한 이유도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칼은 칼자루 끝에 금으로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머리가 새겨져 있는 용문환두대도인데 용이나 봉황 문양은 소유자가 왕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게 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부장했다기 보다 홍씨의 말처럼 죽음까지도 함께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홍씨는 “칼을 절대 살생의 의도로 지녀서는 안되며 자신을 보호하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수호신처럼 모셔야 한다”며 “수양하는 마음으로 소장하고 다뤄야한다”고 강조했다. 선인들은 칼을 매일 손질하면서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고 하니 즉, 칼은 주인과 ‘일심동체’였다.
나전칠기장에서 도검 제작자로
칼의 시대가 지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도검은 이제 사극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무용지물이 됐지만 근래 홍씨를 통해 부활하고 있다. 원래 홍씨는 15세부터 일을 시작해 실력을 인정받은 나전칠기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찾아와 칼에 조각을 해보라고 권했고 공예사를 차려 기념패나 명패 새기는 일을 하면서 금속조각에도 능숙했던 터라 이내 승낙했다. 그때 했던 일은 주로 검도용 칼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무쇠를 두드려 편 뒤 장식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쪽 마음에서 전통도검을 만들고 싶다는 간절함이 커져갔고 공주박물관에서 본 무령왕릉 환두대도가 자꾸만 떠올랐다.
“세계적으로 일본 검이 유명하지만 그 원류는 우리의 전통 검에서 시작됐고 백제 무령왕의 용문환두대도가 그 시원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사업성을 포기하고 전통 재현에 치중했지만 이내 어려움에 봉착했다. 의견을 교류할 어느 누구도 없었을 뿐더러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시간이 어떤 일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과정도 쉬운 일이 없어요. 칼 제작은 모든 기술이 총망라돼 있죠. 혼자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컸고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느꼈죠.”
모든 분야 섭렵, 최고 장인만이 가능
칼은 종합예술품이다. 쇠·금·은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금속공예, 목공예, 혁공예, 주조기술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칼날은 달군 무쇠를 넓적하게 두드려 일정한 형태가 잡히면 다시 접고 펴기를 반복한다. 두 번 접으면 네 겹, 네 번 접으면 열여섯 겹이 되는데 겹이 많을수록 그만큼 단단해지고 두드릴수록 불순물이 제거된다.
칼집은 목공예 분야다. 질기고 부드러운 피나무를 반으로 자른 후 한가운데를 파내고 이것을 아교로 붙여 칼날이 들어갈 공간을 만든다. 칼 두께랑 일치해야하므로 섬세하게 파내야 한다. 자칫하면 발도할 때 잘 빠지지 않거나 들고만 있어도 칼이 빠져버릴 수 있다. 외부는 대패로 다듬어 모양을 내고 물을 흠뻑 뿌린 가마니로 둘러싸인 방에서 7번 이상 옻칠을 해 마무리한다. 물을 뿌리는 이유는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고 떠다니는 먼지를 잡기 위해서다. 마지막 옻칠을 할 때는 작은 먼지 하나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작업한다. 손잡이는 금실과 은실 등을 이용해 장식한다.
원래 조선시대 칼은 각 분야 최고 장인들이 모여 공동으로 만들던 합작품이다. 이것을 홍씨는 전과정을 혼자 하고 있는 것이다. 못 버티고 다들 포기해 버리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홍씨의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 방식 그대로 철까지 제조하겠다는 것만 봐도 그의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재작년에 직접 진흙으로 고로를 만들어 철광석을 녹여보긴 했지만 실패했다.
“3일간 불을 때야 하는데 돈이 만만치 않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간 꼭 순수한 쇠를 만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전통 그대로 환두대도를 복원할 겁니다.”
사인검으로 대통령상 수상
홍씨는 작년 11월 제28회 전승공예대전에서 사인검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사인검은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이 네 번 겹치는 때, 즉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쇳물을 부어 만든다는 보검으로 양기가 강해 음하고 사악한 기운을 없앤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유일하게 칼집과 함께 발견된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을 복원했고 이를 응용해 또 한 자루를 만들어 총 두 자루로 이뤄졌다. 칼날의 한 면에는 ‘사인참사검’이라는 명문과 국가의 어려움을 물리치는 기원을 담은 주문을 새겨 넣었고, 다른 면에는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28개의 별자리를 금입사로 새겼다.
이전에도 홍씨는 곽재우 장군 칼, 이순신 장군 지휘도, 무령왕 용문환두대도, 가야 단봉환두대도를 재현한 바 있다. 그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건 역시나 무령왕 용문환두대도다. 그가 이 길을 가게 된 계기였고 앞으로 계속 이 길을 가게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홍씨는 아직 명검이라 내세울만한 칼을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눈빛은 마치 명검탄생은 시간문제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손에서 명검이 탄생하는 날, 우리는 말할 것이다. 한국 전통도검의 역사가 오롯이 이어졌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