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되지 말고 그냥 즐겨라”
아시아 최고 일류전 매직의 일인자, 재일교포 마술사 유지 야스다
조물주의
마법으로 계절이 바뀌고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던 11월11일, 거리를 온통 카펫처럼 뒤덮은 은행잎을 밟으며 서울 정동 제일화재 세실극장으로
향했다. 공연장 안은 쌀쌀한 바깥 기운과 달리 열기가 감돌았다. 이내 노란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를 흔들며 상기된 표정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리허설이 한창이던 재일교포 마술사 유지 야스다(44). 한국어를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당초 염려에 멋지게 어퍼컷을 날리며 그가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청했다.
마술사 정성모와 의형제지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꼭 한번은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때마침 아우 성모가 제안해 이렇게
이뤄지게 됐습니다.”
그는 조금 흥분돼 있었다. 소풍가는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루는 아이같다고 할까? 한국국적을 지녔음에도 이제야 처음 갖는 국내공연,
그리고 아우와의 조인트, 당연히 심장이 안 뛰고 배기겠는가.
유명 마술사이자 현 서일대학 레크레이션학과 마술 담당교수인 정성모 씨와 그는 의형제지간이다. 3년전 미국 라스베가스 세계마술컨벤션에서 우연히
만나 교감을 나눈 후, 작년 공식적으로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이들 형제가 만들어내는 첫 번째 무대가 이번에 펼쳐지는 ‘마술콘서트’다.
“한국 관객들은 반응이 즉각적이라 쇼를 하는 사람도 즐거워요. 최고의 재미를 선사할 겁니다.”
문득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 그의 국적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일생을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도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데 왜 일본국적을
얻지 않았는지, 또 원래의 조선적을 버리고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곧 그 질문이 우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국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일본도 북한도 한국도 아닌 다만 조선인 마술사입니다.”
그에게 국적이나 사상, 체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국적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뭇 사람들의 관심은 시간낭비다. 그는 단지 ‘마술사’일 뿐이다.
늦게
박수치는 북한 관객
그가 마술사가 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5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구경한 서커스무대에서 마술 공연을
처음 본 후, 혼자 마술도구를 가지고 연습했고, 초등학교 3학년 같은 반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성공적인 무대를 치뤘다. “고깔모양으로 만든
신문지에 우유를 따른 후 없애는 마술이었는데 아마 그때 실수했다면 꿈을 접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한 그는 본격적으로 마술사의 길을 걸어
23세가 되던 해 공식적인 첫 콘서트를 가졌다. 1,600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이 모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마술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죠. 그런데 공연이 끝난 후 저를 불러 이렇게 말했어요. ‘너에게 박수를 보낸 그 사람들에게 더욱
보답하는 훌륭한 마술사가 되거라’. 지금까지도 그 말씀이 제가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크나큰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각종 세계 대회에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특히 일본 최고의 일류전(대도구) 마술의 일인자로 칭송받았다. 일류전 마술은 쉽게
말해 사람을 갑자기 사라지게 한다거나, 부양시키는 등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하는 아기자기한 마술이 아닌 스케일이 큰 마술이다. 그의 명성은
북한에도 알려졌고 급기야 1983년부터 1986년까지 4차례에 걸쳐 초청공연을 가졌다.
“김일성 주석은 마술을 매우 좋아했어요. 우산을 쉴새없이 만들어내는 마술을 보이자 ‘당신이 우리나라 백화점에 있으면 우산 생산은 걱정 없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죠.”
북한 사람들은 박수도 한박자 늦게 칠 정도로 반응이 매우 소극적이라고 한다.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보다 더 힘든
것은 삼엄한 경비 때문에 속임수 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마술 발전에 기여할 터
마술경력 20년이 넘었지만 그는 지금도 매일 연구하고 연습한다. 길을 걸을 때나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언제 어디서든 더 기발한 마술을
보여주기 위해 궁리하고 메모한다. 그런데 요즘 그에게 또 하나 고민거리가 생겼다. 한국 마술을 어떻게 하면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최근 젊은 세대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등 마술붐이 일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라고 말한 그는 “무엇보다 기본을 충실히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학원이 너무나 많고, 좋은 선생이 부족하다”면서 “기본이 탄탄해야
응용도 가능하고 더욱 새로운 마술을 선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그는 앞으로 많은 공연과 다양한 교류를 통해 후배를 양성하고 한국
마술 발전에 기여할 계획이다.
한국에서의 마술콘서트가 끝나면 바로 일본 공연이 잡혀있다. 그는 쉬지 않는다. 1998년 마술사들이 가장 열심히 하는 이에게 주는 공로상인
‘해리 블랙 스톤 어워드’를 수상할 정도로 마술에 대한 그의 열의는 대단하다. 그가 열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관객이다.
“누군가를 재밌게 해준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비록 속임수지만 박수치며 감탄하는 이들을 보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참, 관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가지가 있어요. 마술을 볼 때 어떻게 저렇게 됐을까하며 탐정같은 자세로 보지 마세요. 마술은 그냥 맘껏 즐기는 것이 최고예요.”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