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은 친가, 추석은 외가에서”
종주-박순란 부부의 행복한 명절나기
“여자도 똑같은 자식인데 일년 두 번의 명절 중 한번은 외가에서 보내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런 말을 여자가 아닌 남자가 했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충격이다. 여자라면 당연히 두 손들고 환영할 얘기지만 아직 뿌리깊은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에겐 인상을 찌푸리게 할만한 ‘충격적’ 발언이다. 경기도 안산시에 거주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등부부’ 종주(61
웹마스터)-박순란(53 패션학원 운영) 부부. 그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명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종주-박순란 부부는 명절 차례 준비를 골고루 나눠 분담하고, 화투 대신 민속놀이를 즐기는 등 남자들만 편하고 여자들은 고생인 명절에서 평등하고 즐거운 명절을 지향한다. |
딸도 자식, 처부모도 부모
명절에 대한 제안은 아내 박씨보다 종주 씨가 더 적극적이다. 부모의 피를 똑같이 받았는데 아버지 성만 따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겨 ‘박’씨
성을 떼고 이름만 사용할 정도로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은 종주 씨는 “손자의 입장에서만 봐도 친조부모나 외조부모가 똑같은 조부모인데,
친정에 한번 다녀오는 것조차 눈치 봐야하는 우리네 며느리들이 안쓰럽다”며 “명절은 부계혈통만이 아닌 부모양계혈통의 친족 화합에 의의를
둬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3남3녀 중 장남인 그는 형제들과 의견을 나눠 설은 친가에서 추석은 외가에서 보내기로 결정, 2001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단,
장남이고 노모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종주 씨 가족은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바로 아래 동생은 처부모가 없기 때문에 막내 가족만 매년 이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추석에는 처가에서 보낼 것”이라고 확답하는 종주 씨는 “하지만 처음엔 어머니가 조금 떨떠름하게 여겼다”고
고백했다. 다행히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 불화 같은 건 전혀 없다고 한다.
차례상 간소화, 준비는 다함께
패션디자인학원을 운영하며 안산YWCA 회장을 겸하고 있는 아내 박씨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살림까지 도맡아 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여자이기에 불평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더구나 전래 유교식으로 차례상을 차려야했던 명절이면 박씨는 맏며느리로서 받는 스트레스로 딱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종주 씨가 가부장제 불합리성을 알리는 양계혈통연구소 사이트(www.root.or.kr)를
운영하고, 웹마스터로 재택 근무를 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다. 종주 씨가 청소와 설거지를 분담하고, 가끔은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이어 종주 씨의 제안으로 명절 차례상이 간소화됐고, 음식을 죽은 사람 위주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로
대체했다.
“예전엔 별달리 집안일을 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살림을 분담하더니 명절에도 음식장만이며 설거지 등을 하더라고요. 처음엔 가족들이 어색해하고
불편해 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죠. 당연히 명절 스트레스도 사라졌고요.”
이에 대해 종주 씨도 “살아계신 부모를 섬기며,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고, 아울러 그 자손들끼리 화합하는 것이 명절의 진정한 의미”라며,
“격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두가 편안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화투, TV시청 금지… 대화, 민속놀이 권장
‘정치나 종교 이야기하지 말 것, 화투치지 말 것, TV보지 말 것’ 이 세가지는 명절에 지켜야 할 종주 씨네 가족 철칙이다. 대신 윷놀이를
즐기거나 야외로 나들이를 나가고 혹은 차를 마시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 등을 나눈다.
“명절이면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이 모이는데 출신지가 각기 달라 정치 이야기를 하면 지방색 때문에 간혹 다투기도 하고,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죠. 종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이것을 금하고 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대화를 하는 것이 가족간의 불문율이에요.”
명절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수칙에 대해 설명한 종주 씨는 “남자들은 술 먹고 고스톱 치면서 여자들은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만하다 보내는
명절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며 “모두가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인습은 버려야 합니다. 평생을 가부장적 사고에 젖어 그것을 진리로 알고 살아온 부모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들이 퇴장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습니다. 젊은 세대부터 꾸준히 시도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형편에 맞춰 정성껏 부모를 섬기고, 아들
딸 구별 없이 차례를 지낸다면 평등한 명절 문화는 이루어 질 것입니다.”
윷놀이 제기차기 딱지치기 공기놀이 |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