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개방의 첫 신호를 알리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동의안이 지난 2월16일 4번째 본회에서 통과됐다. 그동안 3차례 의결을 시도했지만, 농민들과 총선을 의식한 농촌출신 의원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번번히 무산되어 왔다.
각당의 적극적인 통과 방침에 따라 진행된 표결에서 재적의원 271명 가운데 234명이 참석해 찬성 162표, 반대 71표, 기권1표의 압도적이 표차로 가결됐다.
비준안 통과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와 경제단체는 일제히 환영의사를 밝혔고, 통상전문가들은 “비준안 통과로 우리나라는 잠재력이 높은 중남미시장 진출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동시에 FTA 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지역주의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한·칠레 FTA 국회비준을 계기로 다른 나라들과의 FTA 추진에도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반면에 국회 앞에서 FTA 저지 시위를 벌이던 농민들은 허탈함에 눈물을 흘렸고, 농민단체들은 “향후 제3국과의 FTA 협상과 쌀개방을 위해 DDA 협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통과 소식에 집회장 울음바다
이날 국회비준 저지를 위해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던 농민들은 본회에서 비준안 통과 소식이 전해지자 국회 진입을 시도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농민들은 지도부의 안이한 대처로 손놓고 FTA 통과를 지켜봐야 했다며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리 발언에 나선 문경식 전농 의장은 “민족 농업을 팔아 넘긴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심판운동을 벌여 오는 17대 총선에서 반드시 농민의 힘으로 낙선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문 의장은 “투쟁이 오늘로 끝난 것은 아니다”며 “이후 쌀개방 반대 투쟁을 위해 각 단위 조직화에 더욱 힘써 줄 것”을 요청해 향후 농민단체와 정부간 농산물 개방을 둘러싼 진통이 계속될 것임을 나타냈다.
박웅두 전농 정책위원장은 “비준안 반대에 서명한 국회의원 1백47명 중 절반 이상이 농민과의 약속을 져버렸다”며 “배신한 의원들을 추려내어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 비준안 국회 통과를 앞장서 저지한 의원들은 나름의 선별 작업을 거쳐 지지후보를 선정 할 것”이라고 덧붙여 농민단체에서도 낙선-지지당선운동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첫 FTA 상대 칠레, 잘못된 선정”
박진도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2월1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주최로 열린 `‘FTA 관련 언론보도 이대로 좋은가’ 주제의 토론회에서 “한국과 칠레의 FTA는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우리의 실익은 작고 농업부문에 대한 피해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칠레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출액이 0.3%에 지나지 않고 다국적기업의 무한경쟁으로 공산품 수출이 늘어날 여지도 많지 않은 반면 과수, 축산, 시설원예 등의 분야에 커다란 피해가 발생할 것이 예상된다”면서 “정부나 재계도 칠레와의 FTA가 우리 경제에 별 도움이 안될 것을 알고 있고 FTA 첫 상대로 칠레를 잡은 것이 잘못됐다는 것도 깨달았지만 이것이 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나라하고도 FTA를 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이라고 풀이했다.
박 교수는 “FTA 처리과정에서 보수언론과 정치인, 정부와 재계가 한 목소리로 마치 칠레와의 FTA가 처리되지 않으면 한국경제가 망할 것처럼 사실을 왜곡해 국민 여론을 호도함으로써 FTA에 반대하는 사람을 `‘왕따’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FTA가 국익 증대에 기여하고 반대하는 것은 집단이기주의라는 식의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형성됐다”고 비판했다.
향후 쌀 개방에 영향 미칠 듯
한·칠레 FTA의 비준은 현재 협상이 진행중인 한·일, 한·싱가포르 FTA는 물론 한국과의 FTA 추진을 검토중인 다른 나라들과의 협정 추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 일본과 정부간 1차협상을 시작한데 이어 지난 1월에는 싱가포르와도 협상에 들어가 올해에는 한·일, 한·싱가포르 협상이 매달 번갈아 열리게 된다.
정부는 작년 10월 방콕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과는 2005년, 싱가포르와는 2004년 안에 타결하는 것을 목표로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일본과의 첫 협상에서는 2005년까지 타결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상품무역 비관세조치 투자서비스 기타 무역이슈 분쟁해결 경제협력 상호인정협정 등 6개 분과를 만들어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또한 한·칠레 FTA 비준안 통과는 올 4월부터 협상이 본격 시작되는 WTO 쌀개방 DDA협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전농 박웅두 정책위원장은 “칠레 협상결과가 DDA 협상에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며 “FTA에서 우리는 선진국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DDA협상에서 개도국 지위 유지와 관세화 유예를 요구하는 데 협상력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고 주장했다.
농림부, “농민·농촌 피해 최소화 만전”
농민들의 주장에 대해 농림부는 한·칠레 FTA 비준을 조건으로 증액됐다가 비준안 처리의 지연과 함께 예비비로 편성된 농림예산 5,539억원을 당초 계획했던 용도대로 쓸수 있게 됐다면서 농업 개방에 따른 농민과 농촌의 피해 최소화에 만전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은 “농업에 미칠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해 나가겠다”면서 “특히 10개년 농업·농촌 종합대책과 119조원대의 투·융자 계획을 차질없이 시행에 옮길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농림부는 이미 예산이 확보된 정책자금 및 상호금융 금리인하, 조건불리지역 직불제, 영유아 양육비 지원 확대 등 사업을 조만간 개시하고 FTA특별기금을 통한 과수농가 시설 현대화 및 폐업보상금 지급사업도 조기에 벌여나갈 계획이다.
특히 4대 특별법과 함께 119조원 규모의 10개년 투융자 계획을 근거로 향후 도하개발아젠다(DDA) 등 추가 농산물 시장 개방 확대에 대비한 농업. 농촌 대책 실현에 역량을 집중할 방침이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2월25일 한국과 칠레정부는 국회비준 등 모든 절차가 완료됨에 따라 한ㆍ칠레 FTA를 오는 4월1일부터 발효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 휴대폰 등 2,450개 품목이 오는 4월1일부터 관세를 전혀 물지 않고 칠레시장으로 수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