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당사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종필 총재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
JP가 4월19일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4·15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명분이었다. 자민련은 제17대 총선에서 충청지역구 4석 확보에 머물렀고, JP 자신조차도 비례대표에 당선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로써 35세 때인 1961년, 처삼촌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에 가담한 후 43년 동안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그가 정치무대에서 퇴장함으로써 공식적으로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
“노병은 죽지 않지만 조용히 사라질 뿐”
아이러니하게도 JP가 정치인생을 접은 날은 4월19일. 1960년 4·19로 타오르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불길을 5·16 총칼로 강제 진화하는 데 일조한 그가 44번째 맞는 4·19 기념일에 은퇴한 것이다.
그는 1961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43년 동안 정치규제, 김영삼·노태우 등과의 3당 합당, 김대중과의 연합 등을 통해 철저히 자기만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의 정치생명 연장은 1971년 이후 싹튼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었기에 가능했다. 호남은 DJ, 영남은 YS가 분할한 가운데 JP는 충청을 텃밭으로 다졌다. 충청권은 그가 정치적 위기에 몰릴 적마다 아낌없는 지지로 구원했다.
그러나 2002년 6·13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하고 소속 의원들마저 탈당,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다시금 위기가 시작됐다. 게다가 민주당이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을 카드로 내세우면서 자민련은 존립 근거마저 사라졌다. JP는 더 이상 충청권의 맹주가 아니었다.
그를 은퇴로 내몬 결정적 사건은 ‘대통령 탄핵’이었다. ‘한-민 공조’에 의한 탄핵에 뒤늦게 발을 들여놓으면서 ‘탄핵역풍’에 치명타를 맞은 것이다.
17대 총선을 통해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호언하던 그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세를 복원시켰지만 민주당마저 호남에서 나가떨어지는 판국에 정치적 아우라를 잃은 JP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자민련은 총선 결과 충남지역 4석, 정당득표율 2.8% 획득에 그쳤다. 따라서 비례대표 배분 요건인 ‘지역구 5석 내지 정당득표율 3% 이상’ 달성에 실패함으로써 ‘비례대표 1번’ JP의 10선 대망도 물거품이 됐다.
총선 후 사흘 동안 청구동 자택에서 거취와 관련 고심하던 그는 4월19일 오전 당사에 출근,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날 “패전의 장수가 무슨 말이 있겠느냐, 모든 게 저의 부족한 탓”이라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43년 동안 몸담았던 정계를 조용히 떠났다.
JP가 은퇴함에 따라 자민련은 ‘포스트 JP’ 시대를 향한 진로 모색에 들어갔다. 자민련은 5월7일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를 선출할 방침이다.
지도부 경선에는 이인제 김학원 당선자, 이한동 전 국무총리, 안대륜 의원 등이 도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