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왜곡’으로 뜨겁게 달궈졌던 정치권이, ‘과거사’ 전쟁으로 넘어가 여야가 대립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주도하에 집권 여당인 열린 우리당이 ‘과거사 규명’을 추진하고 있는 형국이고,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은 거부감을 나타냈다 ‘친북·용공’도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방향을 틀어 합의에 도출했다.
전세는 여권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신기남 전 의장과 이미경 중앙상임위원 등의 친일행적이 폭로되면서 역풍을 맞았다. 인터넷상에 정치권 지도급 인사들의 친일 행적이 계속 유포되자, 정치권이 긴장하고 있고, 여권은 ‘음모론’ 마저 제기하고 있다. 이제 여·야는 정치권 밖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설립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으나, 조사의 범위와 대상, 형식과 역할 등에 대해서는 첨예한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정치권 내의 ‘과거사 규명’은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시각이 강하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경제부터 살려야 할 것 아니냐”며 무관심한 표정이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 지적
과거사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먼저 신호탄을 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진상규명’과 이를 위한 ‘국회 특별 위원회 설치’를 제안하면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 진보·보수 사회세력이 전쟁이 시작됐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규명에 대한 의지를 강도높게 주장해 왔다.
이번 과거사 전쟁은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의 양대 싸움으로 비춰진다. 정체성 논란으로 초반 기세를 유지하던 박근혜 대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박근혜 대표가 7월19일 국가 정체성 문제를 내세워 전면전을 선포하자, 뒤이어 노 대통령이 7월29일 “지금의 정치적 전선은 과거 유신시대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를 선택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며 박 대표를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에,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일 뿐 정쟁거리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시민단체 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전력을 이유로 박 대표의 정계 은퇴를 공식 촉구하는 등 수세에 몰렸다. 이에 한나라당은 초반 과거사 규명에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박근혜 대표가 과거사 조사범위에 ‘친북·용공’도 과거사에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과거사 특위 구성 제안’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이는 위기에 몰린 박근혜 대표가 노 대통령 장인의 좌익 전력을 겨냥하고 과거사 공방의 불리함을 희석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뵌다. 하지만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다.
정치권에 도는 ‘친일괴담’
정국은 여당 중심으로 흘러가는가 싶더니,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친일 행적이 드러나 사퇴했고, 이미경 중앙상임위원도 부친 친일 의혹이 일면서 자백해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여당의 차기 대권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부친 친일 행적과 김희선 의원의 ‘독립운동가 자손 사칭’까지 문제가 확산되면서 막다른 길목에 서게 됐다.
집권 여당인 우리당 지도부들의 친일 행적이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과 관련, 당내에서는 정치적 공략이 들어있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고, 야권은 ‘물타기’라며 발끈하고 있다. 과거사 규명문제가 당초 취지와 달리 객관적 진실을 밝혀내기보다 인터넷을 통한 흠집내기식 ‘마녀사냥’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여권의 잇단 사건들에 한나라당이 감싸고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은 과거사 공방이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꺼리고 있는 분위기다. 임태희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난 22일 브리핑에서 “돌아보면 부끄럽다. 정치권이 이런 걸로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우리당은 친일 진상 규명에 적극적인 입장이다. 한나라당도 조사범위에 ‘친북·용공’을 포함시킨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야는 과거사 조사의 범위, 관련기구의 형식과 역할 등에 대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 근본취지 무색
여야는 일단 정치권 밖에 중립적 기구를 둬야 한다는데는 의견접근을 이뤘다. 우리당은 당초 국회의장 산하에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를 두고 국회내에 과거사특위가 주도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지난 21일 국회밖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나라당은 중립성과 객관성이 검증된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를 국회밖에 설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사범위에 대해서 열우당은 일제하 친일행위자에 대한 심판과 신군부 정권하에서의 의문사와 인권침해 등이 우선돼야 한다는 반면, 한나라당은 친북 용공행위에 대한 조사도 포함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열우당은 한나라당의 주장을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정치공세를 퍼부었고, 한나라당은 ‘야당 지도자 흠집내기’에 여당의 목적이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양당 모두 정치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 조사기구가 설치돼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권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우리당은 실질적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한나라당은 자율성과 형평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여야가 경쟁적으로 과거사에 매달릴 경우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근본취지는 살리지 못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당이 정국의 무게중심을 과거사 문제에서 경제로 전환하는 것은 과거사 문제가 다소 소강국면에 접어든데다, 어려운 경제상황에 따른 민심의 악화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나라당도 과거사 공방이 민생안정과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지난 25일 향후 과거사 정국에서 시민단체 활동이 여론을 주도할 것이라는 내용의 열린 우리당 내부 문건이 공개돼 또한번 파문이 일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과거사 규명 정국이 정치권의 정쟁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시민단체 활동이 여론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경우 친북 용공을 과거사 규명에 포함하려는 한나라당은 고립될 가능성인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여당의 ‘과거사 캐기’가 정략적 차원에서 비롯됐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23일자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은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FT는 8월23일자 사설에서 “노대통령과 측근들의 과거사 진상규명이 국가적 카타르시스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보수야당을 깍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경희 기자 metell@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