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입센의 ‘인형의 집’은 많은 여자들을 억압적 현실에서 벗어나게 했고 ‘전태일 평전’은 청년들의 가슴에 저항의 불을 당겼다. 하지만 그건 과연 단지 예술의 힘일까. 세상을 바꾼 작품들은 부조리의 현실에 대한 집단적 의문과 회의가 극에 달했을 때 시기적절하게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예술은 변화하는 인간을 행동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인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특히 대중문화가 현실을 선도하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드라마가 불륜과 이혼을 조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불륜과 이혼은 드라마보다 현실에서 더 빈번하다. 대중문화는 철저히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는 편이 맞는 논리다. 한국은 유교중심 사회에서 개인적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대중문화의 그 많고 많은 ‘이야기’들은 한국의 이 과도기를 잘 내포하고 있다.
‘싱글즈’와 ‘애정의 조건’, 세계관의 격차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는 그만큼 한국인, 혹은 특정 계층에게 부합되는 정서의 코드를 간직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혼란이 뒤따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 ‘싱글즈’ 같은 영화나 MBC의 ‘아줌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 같은 드라마들이 호응을 얻은 것을 보면 현대인, 최소한 젊은 세대의 의식수준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하지만 KBS 드라마 ‘애정의 조건’ 같은 구시대적 드라마 또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청자 집단이 계층이나 연령대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진영의 세계관은 천차만별이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이혼이나 혼전 성관계 등의 가부장적 가치는 논란의 대상에서 초월해 있다. ‘싱글즈’의 경우 더욱 그렇다. 여자 주인공은 좋아하는 남자에게 성적으로 유혹하기에 여념이 없고, 친구와 실수로 성관계를 가진 이후에도 변함없이 친구 사이를 유지하기도 한다. 심지어 스스로 당당한 미혼모의 길을 선택한다.
사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현대사회의 트렌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현실은 그럴까? ‘애정의 조건’이 40%를 웃도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쿨’한 신세대적 사고방식이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만든다.
남자의 외도는 용납되면서 여자의 맞바람은 질시되는 것이나, 남자의 과거 성경험은 묻히면서 여자의 과거는 혹독한 시련을 불러오는 것, 무조건 참고 살라는 처가 등 드라마 속 갈등 코드들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세계관에 속해있는 시청자가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든 것들이다.
가부장적이면서 진보적인 척하는 남편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두 진영의 문화가 융합된다. 많은 시청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 두 가지 캐릭터나 스토리를 모두 즐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싱글즈’는 신세대들에게 깊숙이 침투한 의식이긴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애정의 조건’식 풍토가 남아있는 것이다. 두 진영 모두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싱글즈’의 장진영이나 엄정화가 ‘애정의 조건’ 속 주인공으로 치환(물론 한가인처럼 행동하진 않겠지만)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가치관의 갈등이 드라마 속에서 실질적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애정의 조건’은 노골적으로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드러냈지만 이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실제건 의식 속이건 간에)이기 때문에 ‘먹힌’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 남편들은 유교적 가치를 저버린 아내에 대해 ‘용서’와 ‘이해’를 선택하는 대신, 시부모들은 ‘경멸’과 ‘질시’의 정서를 버리지 못한다. 과도기를 대표하는 남편들은 아내의 과거나 외도를 이해한다는 식의 몸짓을 취하면서 부모세대보다 한 단계 진보한척하는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그들 자신은 결코 ‘깨끗하지’ 못하더라도 아내의 부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이해로 아내를 용서한다.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정한 과거를 알고 폭력적으로 돌변한 남편에게 울며불며 매달린다. 억압적 집에서 여자는 쉽게 홀로 걸어 나가지 못한다. 여전히 청순가련 모드로 청승을 떨거나 뺏긴 아이가 보고 싶다며 울기만 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며 수렁에 빠진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남자다.
인식의 전환기에 위험한 이데올로기
이 같은 철저한 가부장적 드라마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땅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하게 과도기의 사춘기를 앓고 있는지를 증명해준다. 언젠가는 치유될, 하지만 지금은 흉하기 짝이 없는 곪아터진 여드름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춘기 소년은 본질적으로 덜 여물었지만 스스로는 어른인 척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 드라마의 현주소도 그렇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끼워 넣고 여성의 고민을 여성의 입장에서 그리는 척하면서도 유교적 윤리관으로 마침표를 찍는 KBS ‘아침마당’처럼,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교묘하게 가부장적 가치관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겉으로는 진보성을 흉내 낸다.
대표적인 것이 의존적 성향의 여성 캐릭터. SBS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그려진 유선은 사실상 건태 역의 오대규의 도움으로 작가가 된다. 강인한 캐릭터인 박예진 또한 남자의 도움으로 성공에 이르긴 마찬가지.‘남자 신데렐라’를 차별점으로 내세운 KBS2 '오! 필승 봉순영'에서 신데렐라는 안재욱으로 그려졌는데 진짜 신데렐라는 두 명의 재벌 사이에 낀 채림이다. 안재욱은 숨겨졌던 출생의 배경과 자신의 노력으로 신데렐라에 오르지만 채림은 그야말로 가만히 팔짱끼고 서서 단지 남자의 사랑 하나만으로 왕비로 간택되는 것이다.
현실이 유교문화와 서구적 근대성 사이에 어정쩡하게 헤매고 있으니 드라마인들 어쩌겠나. 하지만, 대중 심리에 얄팍하게 영합하는 드라마를 이해하기에는 그 ‘양다리’ 걸치기의 위험성이 너무 심각하다. 망설임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는 인식의 전환기에 한 편의 드라마는 대중을 행동하게 만들 수도, 반대로 주저앉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