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정치권이 ‘국가기밀’ 관련 발언 등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급기야는 지난 7일 조달본부에 대한 국방위 국감에서 여야의 ‘스파이’ 논란으로 인해 처음으로 감사가 중단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특히 지난 1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의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는 ‘국가기밀’ 유출 논란이 재연되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여당과 야당은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 ‘국가기밀’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 박진·정문헌 2급 기밀누설?
국정감사 첫째날인 지난 4일 국방위 국감에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2급 기밀문서를 인용, “주한미군이 없으면 전쟁시작 보름만에 서울이 무너진다”고 주장했으며 같은날 통외통위에서는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이 북한 유사시에 대비한 ‘충무 3300’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와함께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1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의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 보도자료를 통해 전시대비 탄약의 비축물량이 부족하다며 세부 내역을 공개했다. 박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미 연합군의 전시대비 비축 탄약의 총보유량은 군사작전상 목표(60일 기준)의 59%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군이 보유한 탄약을 제외하면 한국군의 비축량은 10일치(추정)에 불과한 상태며 북한의 포병 및 기갑전력에 대응할 육군의 K1A1 전차와 K-9자주포, 다연장로켓포 등의 핵심 장비는 수일밖에 버티지 못할 만 큼 탄약 확보가 부실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열린우리, “자료제출 거부 당연”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진·정문헌 의원의 국가기밀 누설과 관련해 징계안을 국회 윤리위에 제출하는 한편, 정부가 국가기밀을 국회의원에게 서면 제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합당하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그동안 국가기밀에 대해서는 서류로 제출하지 않고 열람 또는 구두로 보고를 해 온 것으로 이번 서면 제출거부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와함께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 등에 관한 법률’ 4조 1항은 ‘군사 외교 대북관계의 국가기밀에 관한 사항으로서 국가 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경우 장관은 자료제출 요구를 받은 날로부터 5일 이내 설명하고 자료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현미 대변인은 “국가기밀인 충무계획의 존재와 함께 ‘16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다’는 내용을 국회 상임위라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질의된 것은 명백한 국가기밀 누출인 만 큼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종걸 원내수석 대표도 “두 의원이 사전에 보도자료를 통해 국가기밀을 공개한 것은 형사적 처벌마저 논란이 되는 불법 유출”이라며“면책특권을 내세워 이런 식으로 기밀을 누설하면 앞으로 정부가 의회와 기밀을 공유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며 따졌다.
한나라, “윤리위제소 문제있어”
한나라당도 박진 의원에게 ‘스파이’ 발언을 한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와 안영근 의원을 윤리위에 맞제소키로 했으며 열린우리당의 박진·정문헌 의원에 대한 윤리위원회 제소는 ‘생트집 잡기를 통한 국감 훼방행위’라고 일축했다.
박진 의원은 ‘2급 군사기밀 유출’이라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발언이 구체적 수치, 전략, 작전계획 및 전개상황, 부대 배치, 향후 추진 계획 등 민감한 부분은 인용하지 않았으므로 기밀 유출이 아니라는 논리를 제기했다. 또 박 의원은 국정감사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도 “적법 절차에 따라 자료 요청과 열람, 대면보고를 받은 뒤 질의서를 작성했을 뿐 아니라 감사 하루전 정부측에 질의서를 사전에 제출했다”며“정부측으로부터 비밀 여부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나 비공개회의 요청도 없어서 공개적으로 질의했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정문헌 의원은 여당이 중대한 비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충무 계획’은 지난 1991년부터 지속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 기밀유출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면책특권 놓고 법조계 논란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기밀을 분석해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하고 문제점을 국감 현장에서 공공연히 제기한 것은 직무수행의 연장”이라며 자신의 국감장 발언은 당연히 면책특권에 해당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측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한나라당 박진·정문헌 의원의 군사기밀 공개에 대해 사법적 책임까지 묻겠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국가기밀 내지 군사상 기밀이라도 면책특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으며 헌법 45조도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해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밀공개가 면책특권의 요건인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의 요건을 충족했느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고 있어 상황에 따라서는 면책특권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려대 장영수 법학교수는 “보도자료를 배부한 것은 ‘발언과 표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따진다면 면책특권이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건국대 임지봉 법학교수는 “대법원은 면책특권의 요건에 대해 직무행위 그 자체 뿐 만 아니라 부수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며“군사기밀 공개는 물론 관련 보도자료 배부까지도 면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밀분류체계 재검토 필요
국가기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에는 근본적으로 비밀로 분류하고 있는 표현이 모호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국가기밀은 비밀취득 인가권자가 정하고 있으며 1급은 누설시 전쟁, 외교관계 단절 등을 가져올 수 있는 최상위 비밀이며 2급은 국가안전보장에 ‘막대한 지장’을 3급은 국가안전보장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특히 ‘막대한 지장’ ‘손해’ 등이 애매모호한 가운데 업무특성상 ‘비밀’이 많은 외교통상부의 경우 하루에 생산되는 기밀이 1,000건에 달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기밀분류체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법사위)은 “과거 군사정부때부터 적용됐던 분류체계가 지금 시대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권영세 의원은 “기준이 추상적 표현으로 돼 있다”고 합세했다. 이에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도 “인터넷에 고급정보들이 공개돼 있고 국민들의 알권리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분류체계를 재검토하는게 맞다”고 설명했다.
정민철기자 chull@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