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열린 제5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폐막식장. 최고 작품에 주어지는 황금곰상의 주인이 호명됐을 때 객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거장들인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켄 로치의 신작들과 ‘비포 선셋’ ‘몬스터’ 등의 화제작들을 제치고 31살의 젊은 독일 감독 파티 아킨의 ‘미치고 싶을 때’가 황금 트로피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평단은 ‘미치고 싶을 때’가 영화제를 젊게 만들었다고 호평했다.
위장결혼, 예정된 사랑과 고통
블랙 유머와 멜로적인 감성을 오가는 구성, 음악으로 나레이션을 대신한 형식의 참신함. ‘미치고 싶을 때’는 이 같은 매력을 갖춘 신선한 멜로드라마다. 터키계 독일인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쫓으며 사랑이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하는지 진지하게 탐구하는 내용이 기본 스토리. 야생화 같이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20살 여자는 자유의 탈출구로 남자에게 위장 결혼을 제안하고 남자는 순진한 호의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사랑은 계약 조건에 금지돼 있던 조항. 하지만 어김없이 사랑의 시간은 예정돼 있었고, 그것을 시기한 나쁜 운명마저 온전히 이들의 몫으로 준비돼 있었다.
자살이란 특별한 계기로 만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아웃사이더 같은 연인들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 멀어 보이지만, 사실 사랑에 대한 이 영화의 시선은 현실에 천착해 있다. 억지 해피엔딩과 거짓 신화를 거부하고 사랑의 천국과 지옥을 성숙하게 살피는 영화의 철학은 우리시대 연인들에게 각별한 공감을 안겨줄만 하다.
주연 배우들의 열연 또한 영화를 빛내는 요소. 하드 코어 포르노에 출연한 이력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비롤 위넬은 감독과 두 번이나 작업해본 적이 있는, 말하자면 감독의 페르소나 격인 배우다. 선이 굵은 얼굴과 깊이가 느껴지는 눈매가 인상적인 비롤은 거친 광기와 섬세한 감정선이 조화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상대역 시벨로 분한 시벨 케킬리는 이번 영화가 첫 출연작이다. 감독에 의해 우연히 길거리에서 캐스팅 된 시벨은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돌한 연기를 펼쳤다.
락에서 터키 전통 재즈까지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귀를 휘감아 오는 음악의 성찬이다. 멜랑콜리한 선율의 터키 전통재즈, 그리고 광기를 잘 표현하는 락 음악 등 영상과 어우러진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포만감을 안겨준다. 특히 이국적인 향이 물씬 풍기는 터키 전통악단의 연주는 이야기 구성 중 독특한 요소로 영화 형식 전반을 참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치가 되기도 한다.
감독은 대본 초안에서부터 자신의 영화에 음악극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음악은 감독이 고전 비극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연출 시 특별히 고려하게 된 부분. 로마의 음악가 젤림 제슬러와 그의 밴드는 감독과 어느 이스탄불 술집에서 처음 만났으며, 감독은 ‘미치고 싶을 때’에 와서 이들 밴드를 스크린 위로 불러내게 됐다. 한편, 이들 밴드가 영화 속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작품의 시정을 더해준다.
영화는 연대기적인 순서로 진행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캐릭터가 변화하는 모습을 더 명확하고 더 진실 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감독은 말했다. 또한 이것은 연기 데뷔를 하는 시벨 케킬리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인이다 보니 감정의 변화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는 촬영 방식이 그녀의 연기를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던 것. 이런 촬영 방식은 결국 영화의 결말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간에 따른 두 주인공의 육체적, 심리적 변화 상태에 맞추어 즉석에서 엔딩을 그에 걸맞게 바꾼 것이다.
감독은 “동료였던 터키 여자한테 위장결혼을 제안 받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엔 거절했지만, 그 말이 계속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제작 동기를 밝혔다. 영화 또한 감독이 받았던 그 제안의 파장처럼, 관객의 마음을 오래도록 흔들 것이다.
지우지 못할 사랑 내 머리속의 지우개 감독 : 이재한 체게바라의 청춘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감독 : 월터 살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