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백인들의 영토에서 뿌려진 문화적 ‘포탄’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던 아시아가 드디어 자신들의 대륙과 피부색에 눈떴다. 아시아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아시아적 동질성을 확인한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중국 음식을 먹고, 한국인이 말레이시아 북을 두드리며, 중국인이 필리핀 전통 의상을 입는가 하면, 같은 스타에 열광하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춤을 추고, 같은 드라마에 울고 웃게 된 것이다.
서구문화에 매몰됐던 과거
최근까지만 해도 아시아는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가깝지만 먼 나라였다. 헐리우드 영화에 한국어 더빙은 익숙해도 같은 동양인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 성우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반응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일본의 대중공연 가부끼나 중국의 대표적 전통의상 치파우, 필리핀의 전통요리 아도보, 캄보디아의 민속 춤 압살라 댄스 등은 낯선 이국 문화였지만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햄버거, 청바지, 재즈 등은 일상적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만큼 서구 문화가 문화의 기준이자 대표였다. 하지만, 홍콩 영화가 한차례 동아시아를 휩쓸고 일본 문화가 꾸준히 아시아 젊은이들을 매혹시키는 사이에 동아시아는 동질성을 조금씩 확인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센 한류 열풍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코드로 소통을 시작하면서 ‘서로의 같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정서적 국경을 지워나가다
동아시아는 한류를 통해 정서적 국경을 지워나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패턴으로 소화되고 있다. 한국의 10대를 사로잡은 귀여니는 중국의 10대들에게도 통했고, ‘네 멋대로 해라’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등 한국의 ‘마니아 드라마’들은 일본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았지만, 시청자는 열광적 소수에 머무르는 공통점을 보였다.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엽기적인 그녀’ 등의 작품들이 비난 속에서도 막강한 흥행 파워를 보인 것도 같았다.
특히, 인터넷의 확산은 문화 국경을 무서운 속도로 무너뜨려갔다. 각국의 네티즌들은 인터넷 세계 속에서 문화적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도 나누면서 동질감을 쌓아갔다.
일본의 한 영화 사이트에 올라온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에 대한 관객평가는 간략하면서도 명확하게 ‘아시아적인 어떤 정서’의 존재를 절감하게 한다. ‘집으로’에 대한 일본 영화평의 대다수가 ‘나의 외할머니가 생각나서 한없이 울었다’는 종류의 것들인데, 이것은 전 동양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서는 동아시아인들의 원초적 감성 어디에선가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유럽의 수많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아시아적인 어떤 것’에 매력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이 같은 아시아적 정서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손을 잡다
정체성의 확인은 연대로 이어졌다. 한류의 배경에는 아시아인들이 아시아적인 것에 눈뜨는 변혁적 마인드가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서도 한류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문화에 대한 일방적 전파가 아닌 교류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동아시아 최초의 다국적 대중문화 트렌드 잡지 ‘이에이 뉴스’가 서울 도쿄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도시에서 동시 창간됐다. 비슷한 시기 문화관광부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는 무크지 ‘문화아시아’를 내놓았다. 아시아적 감수성을 담아내고 아시아인들 간의 이해와 교류를 도모하는 문화 담론을 만들어가는 이 같은 국제 잡지가 등장한 것은 아시아적 마인드가 ‘우리 위주’에서 한 단계 진보해 ‘소통’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문화아시아’의 강내희 편집위원은 “우리가 이해하는 아시아는 어떤 시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시아의 문화라는 것이 어떤 가치들을 갖고 있으면 그 가치들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를, 아시아인들의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문화 이야기를 통해 탐색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각종 문화 행사도 아시아와의 연대를 통한 스펙트럼 확산을 모색하고 있다. 동아시아 다국적 예술가 집단의 작품들은 부쩍 늘어나고 있으며, 아시아 문화 관련 카페 또한 속속 증가하는 추세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문화의 연대와 발전에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으며, 독립예술제인 프린지페스티벌 또한 아시아 네트워크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미국문화의 초기 전파기에 당대 신세대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듯이 탈 서구적인 아시아적 마인드는 10대들에게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고 아시아의 청소년들과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공감대를 쌓는 ‘글로벌 네트워크 프로젝트’는 새로운 10대 문화의 대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부적 비전과 마인드의 진보 없어
하지만 이 같은 교류들이 민간 차원에서 주도되고 있으며, 정부적인 비전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이 크다. 아시아적 문화 마인드는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의미가 담겨있다. ‘20세기 동아시아 3부작’을 집필하기도 했던 소설가 황석영 씨는 동아시아 차원의 문화연대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동아시아인이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 따라 강요되는 미국식 삶의 방식에 대안도 없이 따라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미국식 세계화에 저항하는 동아시아의 또 다른 문명의 대안을 모색해 봐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미국식 문화제국주의를 모방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아시아 문화를 바라보는 수준은 여전히 한류의 지속이라는 막연한 전략적 시각에 머무르고 있다. 침투만 남고 교류는 빠진 것이다.
한류 열풍은 한 국가의 문화가 다른 국가의 문화를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서열도 없고 법칙도 없이 흐르고 흡수하고 이동하며 틀에 따라 변화는 물 같은 문화의 속성이 이루어낸 행복한 ‘경계 파괴’다. 이것은 차세대 문화 마인드가 그 동안 내팽개쳤던 아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하되 서구 문화에 대한 ‘의식적’ 거부 또한 없을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아시아 문화의 연대와 소통을 향한 발걸음을 마침내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아직은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