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달 20일 정오(한국시각 21일 오전 2시)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취임 선서식을 갖고 집권 2기 임기에 들어갔다. 갈라진 자국 내 국론과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테러에 대한 위험성 때문에 역대 55차례의 취임식 사상 가장 많은 1만 여명의 경찰과 군이 지상 및 공중, 지하까지 물샐틈 없는 경호를 펼쳤다.
역대 재선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지지율로 출범한 부시 집권 2기의 향후 행보에 대해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을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고 있다.
네오콘의 부활
부시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세계의 폭정(tyranny)을 종식 시키고 전 세계의 자유를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 상하원 및 각국 외교 사절, 시민 등 20여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의 확산’ 과 ‘폭정의 종식’을 집권 2기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한 부시의 발언에 대해 이전보다 강력한 대외정책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미 국내를 비롯한 각국에서 나오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27번이나 사용하면서 전 세계에 자유를 확산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데 대해 LA타임즈는 미국의 대외 정책을 둘러싼 논쟁에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지난 달 22일 분석했다. 신문은 이날 ‘부시, 네오콘을 그늘에서 끌어내다’ 제하의 기사에서 중동국가들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는 강경파 그룹이 부시 대통령에 의해 그늘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명분 논란으로 힘을 잃어가던 네오콘이 집권 2기를 맞아 다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네오콘의 선도적 옹호자인 신보수주의 논객 로버트 케이건은 부시 취임연설에 대해 ‘이는 진정한 신보수주의’라며 ‘이보다 더 이상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악의 축(Axis of Evil)’을 거론했던 연두교서의 발언보다는 상당히 완화된 내용이지만 역대 대통력의 취임사에 비춰볼 때 세계를 향해 던진 메시지가 대단히 강한 수사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피 흘리는 자유는 필요 없다”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연설 내용 때문에 미국 안팎에서는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애쓰고 있다. 우선 부시 2기 행정부가 이란과 북한 등 인권 탄압국가들에 강력한 압박과 제재를 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의 인준청문회에서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예로 쿠바, 미얀마, 북한, 이란, 벨로로시, 짐바브웨를 지목했다.
세계를 미국의 동맹국인 자유사회와 그 상대인 독재사회로 양분하고 그들 독재질서의 변형을 위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되고 있다.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경제, 외교적인 압력까지도 고려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은 취임 다음 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피를 흘리고 석유 냄새가 나는 그런 자유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도 “부시는 새 시대 외교 정책의 축으로 개입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미국 패권 확대의 필요성을 정당화할 것” 이라고 전망하는 등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된 국가들은 일제히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를 반박했다.
“비현실적 이상론” 비판, “장기적 목표 제시” 해명
취임 초부터 적 아니면 우방이라는 이분법적 정책을 펼쳤던 부시 대통령은 그동안의 일방주의적 외교에 대한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듯 자유의 추구를 위해선 내부 단결이 중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자유 세계의 분열은 자유의 적이 추구하는 첫 번째 목표임을 전제하며 자유우방국들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다. 이는 부시 2기 행정부가 국제기구와 동맹국들을 무시하며 일방주의 외교를 펼쳤던 1기 때의 정책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백악관 측은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가 외교정책의 강경 선회 신호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마이클 그린 백악관 안보리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향후 4년이 아니라 40년을 내다보고 한 것”이라며 당장 미 외교 정책이 강경책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친 이상론이며 이라크 전쟁을 미화하려는 표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미국 내에서 나오고 있는데 진보주의측은 물론 보수주의 진영은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 연설이라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백악관 보좌관들은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적극 해명에 나섰다. “취임사는 부시 대통령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지만, 폭정 종식의 목표를 경직되거나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추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취임사는 기존 외교원칙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앞으로 한 세대에 걸친 장기 목표를 제시한 것이며 외교정책의 강경 변화는 아니다”라고 적극 해명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도 이날 “취임사를 새로운 공격 및 무력시위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며 취임사의 진의는 자유에 관해 강조한 것”이라고 거들었다.
대북 정책에도 신보수주의적 이념 반영
취임사에서는 북한이나 이라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없다. 이처럼 특정 국가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세계를 향한 포괄적 메시지를 제시해 자신의 집권기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며 강경적 이미지를 상쇄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로 인해 집권 1기 때보다는 대외정책이 유연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재선 대통령으로는 역대 최저의 지지율에 허덕이고 있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도 악화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폭정과 절망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이고 억압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강력한 인권 외교를 펼칠 뜻을 내비쳤다. 특히 이와 같은 언급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가 지난 달 18일 상원인준 청문회 때 북한을 ‘폭정 전초기지’ 중 하나로 지칭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 주목된다. 이는 부시의 자유 확산 정책에 북한이 당연히 포함됐을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기존의 북한 핵 문제에 대해 군사적, 강압적 대안을 강구하기 보다는 북한의 ‘폭정’에 대해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다 포괄적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강민호 기자 coeur@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