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가 외국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는 당연한 말이 됐다. 그 정도로 외국자본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산업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권에서 그 위험수치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자본의 국내금융시장 잠식으로 인해 토종 금융기관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들 자본은 당초 은행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자금을 풀었던 것이 이제는 보험사와 카드사에까지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은행·보험이어 카드사까지
외국자본이 국내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된 것은 1997년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터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국가 부도사태를 탈출했지만,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들이 외국자본에 하나 둘 매각됐다.
1999년말 미국계 헤지펀드인 뉴브리지 캐피탈이 제일은행을 인수하면서 외국자본의 국내시장 진출을 촉발시켰다. 2003년에는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넘어갔고, 지난해 한미은행도 세계최대은행인 시티은행에 매각됐다.
올들어서도 이 같은 횡보는 그칠 줄 몰랐다. 뉴브리지가 최대주주인 제일은행이 홍콩상하이은행(HSBC)와 스텐다드차다스방크(SCB)의 각축 속에 SCB로 최종결정됐다. 여기에 SK생명도 메트라이프생명보험이 인수할 예정이어서 외국자본의 금융시장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이뤄졌다.
여기에 LG카드와 현대카드도 외국자본에 넘어갈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어 융탄폭격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정도.
지난해 11월부터 현대카드에 대한 실사작업을 끝낸 ‘제너럴일렉트릭(GE) 소비자금융’은 이달부터 지분참여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GE는 30~40%의 지분을 확보해 2대 주주가 되는 방안을 현대카드 측에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GE는 이에 앞선 지난해 8월에는 현대ㆍ기아차 그룹 계열의 할부금융회사인 현대캐피탈과 2006년까지 지분 43% 인수와 후순위채 매입을 통한 1조515억원 투자 등을 골자로 하는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이미 지분 38%를 확보, 현대캐피탈의 2대 주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다. LG카드의 매각 결과도 관심의 대상이다. 1,000만 회원을 자랑하는 LG카드가 해외로 매각될 경우 국내 카드 시장에서 외국자본의 영향력은 단숨에 급상승하게 된다. 이미 물밑에서 우리금융지주 하나은행과 함께 씨티그룹 HSBC SCB 등 외국 금융그룹들이 유력한 잠재 인수 후보자로 거명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대부업을 비롯한 서민금융도 외국 금융자본의 진출이 눈에 띤다. 지난해 10월 대부업법 시행으로 합법화된 소비자금융시장에서는 에이엔오 등 일본계가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티파이낸셜과 지이캐피털 등 대형회사들이 속속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외국자본의 진출 징후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으며 금명간 국내 카드 시장의 중요 변수가 될 것”이라며 “이 경우 자금조달 비용 측면에서 은행계 카드사에 밀리고 있는 전업계 카드사들은 더욱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식보유비율
갈수록 높아져
외국자본의 금융시장 장악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증시에서의 외국인 비중이다. 지난해말 현재 외국인의 증권투자 잔액은 1,750억 달러에 달한다. 지난 2003년말 495억달러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4배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이로 인해 외국인의 보유비중은 40.1%에서 42.0%로 높아졌고, 코스닥 주식 비중도 1.0%포인트 상승한 15.4%로 올라섰다.
거래소와 코스닥을 합친 전체 외국인의 주식보유 비중은 2003년말 37.7%에서 40.1%로 상승한 것이다. 외국인이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지난해 증권투자자금 유출입 금액은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230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외국인의 증권투자자금 유입액은 1,161억7,000만달러에 이르고 유출액은 1,067옥5,000만 달러에 이른다. 이는 2002년과 2003년 유출입액이 각각 1,315억9,000말달러 1,496억2,000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에 비교하면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외국인 자금의 증시유입이 증가하면서 굵지의 기업 상당수가 이들의 의사에 신경을 써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
대표적인 공기업 가운데 하나인 포스코의 경우 지난해말 현재 외국인 지분은 69.0%에 이른다.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외국인 비중은 54.1%다. 자산총액 1위 시중은행인 국민은행의 외국인 지분은 무려 76.1%에 달한다. 이밖에 신한금융지주가 62.9%, 현대자동차 55.8%, KT 49.0%, SK텔레콤 48.4% 등이다. 이를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으로 확대해 보면 외국인 지분 비중은 평균 53.8%에 이른다. 주가가 외국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자, 긍정적 시각 많아
이러한 외국자본의 유입에 대해 전문가들도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외국자본의 공세가 점차 거세지자 국내·외 학자들 가운데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해 조심스럽게 보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외국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절대적이었던 것과는 상황이 변한 것이다.
1월26일 세계경영연구원이 국내·외 대학에서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가르치는 내국인 교수 51명을 상대로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적대적 M&A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조사대상 가운데 8명(16%)은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대답했으며 25명(49%)은 ‘어느 정도 긍정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조사대상 가운데 14명(27%)은 ‘대체로 부정적’이라고 대답했으며 4명(8%)은‘매우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부정적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국내 기업의 성장잠재력 저해(10명)’, ‘국내 자본시장의 안정성 훼손(3명)’, ‘국부유출(3명)’ 등을 이유로 꼽았다.
론스타와 뉴브리지캐피탈 등 해외 사모펀드의 국내 금융기관 인수가 시장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에 대해 28명(55%)은 ‘대체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대답했으나 14명(27%)은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
외자공세 심기불편
금융구조조정을 일선에서 이끌었던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조차 외국자본의 공세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장관은 “제일은행 매각과정에서 당초 기대했던 선진금융기법 도입 등의 효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면서 “이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 외국자본의 역할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과거 외환위기가 극도에 달했을 때 국제적인 신인도 등을 고려해 불가피하게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을 매각했다”고 밝혀 불가피성을 강변하면서도 사실상 ‘과오’를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제일은행은 외환위기를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로 어느정도 가치가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위기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하면서 2년후 지분매각을 허용한 것은 국내은행을 투기대상으로 삼도록 용인했다는 비판이다.
이 장관의 발언은 지난해 매각된 현대투자증권 매각과정을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이 론스타와 뉴브리지와 같은 투기자본이 아닌 푸르덴셜에 넘김으로써 선진 금융기법을 끌어올 수 있는 전기가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제일은행 매각당시 계약당시 뉴브리지가 지분을 매각할 경우 자동적으로 정부지분도 매각키로 함으로 인해 공적자금손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투증권은 지분 20%에 대해서는 푸르덴셜과 정부가 3∼6년동안 각각 매수권(Call Option)과 매각권(Put Option)을 갖도록 함으로써 추후 기업가치를 높여 공적자금 회수를 최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자본 역차별 문제
산업자본 은행소유로 해소
국내자본에 대한 ‘역차별’ 논란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무조건 금기시하기 보다는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볼 시점이라는 견해다. 또 외국자본에 대한 적격성과 심사기준을 강화하고, 정부의 감독체계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6월 내놓은 ‘금융구조의 효율화 방향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자본을 견제하고 산업과 금융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내 산업자본의 지분소유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종 사모투자회사(PEF) 등 국내자본의 육성을 위해 가능한 범위내에서 연기금 과 올 연말 도입 예정인 기업연금의 활용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자본에 대해 글로벌 기준에 따라 적격성 심사를 강화하고 증시 교란행위에 대해서도 엄격한 감시활동을 펼치는 등 금융주권 확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문수 청와대 경제보좌관도 “외국자본이 들어오는 것은 개방경제체제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충분히 관리 하고 규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병윤 금융연구원 부연구위원 또한 “외국자본의 금융 지배력이 커질 경우 외환위기같은 국가적 금융위기 때 이를 돌파하려는 정부의 정책이 외국자본의 독자 행동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도 있다”며, “외국자본에 대한 적격성 심사를 강화하고 외국은행에 대한 정부의 감독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금융연구원 지동현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부각되고 있는 반외국인 정서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 급진전된 개방화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며 “외국자본을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