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이 있다. 그 안에 김준평이 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쁜 형용사로 설명이 가능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괴물’처럼 살았던 사내. 폭력은 그가 왕국을 다스리는 제일 요긴한 도구였으며 그런 그 앞에서 감히 대적할 자 아무도 없다. ‘피와 뼈’는 김준평이 남긴 파란만장한 일대기의 기록이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피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뼈로, 그렇게 육신 하나만을 의지해서 고집스레 괴물처럼 살다간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현존하는 재일 조선인 1세의 일대기 담은 대작
제11회 일본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양석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피와 뼈’는 재일 한국인 감독 최양일과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감독인 디카노 다케시가 의기투합만으로도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원작이 픽션이면서도 현존하는 모델(양석일 작가의 아버지)을 기반으로 재일 조선인 1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대작인 만큼 영화는 숙명적으로 당시 격동의 시대 배경, 오사카의 풍광, 재일 조선인 사회의 생활상, 언어 등을 선명하게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현해탄을 건너와 유랑하는 민족의 비극적 인생을 드라마틱한 엔터테인먼트로 그려내야 한다는 부담도 존재했다. 때문에 원작을 스크린에 되살리는 작업은 상당한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많은 감독이 이 소설의 영화화에 매력을 느꼈다. 욕심을 낸 감독은 많았지만 최종적으로 판권을 거머쥔 감독은 최양일이었다. ‘10층의 모스키토’ ‘언젠가 누군가 살해당했다’ ‘형무소 안’ ‘퀼’ 등을 통해 일본영화계의 독창적 영상 작가로 확고한 위치를 다지고 있는 최양일 감독은 1993년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로 이미 양석일 작가와 인연을 맺은바 있다. 기타노 다케시 역시 오랜 지인으로 지내온 감독의 영화에 흔쾌히 참여했다. 항상 연출과 주연을 겸하던 기타노 다케시가 순전히 주연 배우로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14년 만의 일이다.
문제적 인물의 풍성한 이면
일본 영화계의 거장 삼인방의 결합은 객관적 성과를 일구어 냈다. ‘피와 뼈’는 키네마준보와 닛간스포츠 영화대상 등 일본 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면서 호평을 받았다. ‘피와 뼈’는 기획에서 제작까지 6년 가까이 걸린, 그야말로 제작진의 피와 뼈를 쏟아 부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감독은 “제작 과정을 고투의 역사로 부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원작의 장대함과 서정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할지를 생각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영화의 진정한 완성이란 관객 앞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이라고 난 굳게 믿고 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영화 제작의 매력이자 마력이다”고 말했다.
영화의 포인트는 캐릭터다. 주인공 김준평은 영화사적으로도 주목할만한 문제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인물. ‘폭력적이면서 몰인정하고 동시에 냉혹하고 잔인하다.’ ‘피붙이인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모든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조정한다.’ ‘모든 악행을 몸소 실천하는 괴물.’ 일견 김준평은 이렇게 간단히 정의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극단적인 악당이라면 이 캐릭터의 의미는 그리 눈여겨볼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김준평이 매력적인 이유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엔 좀 더 풍성한 이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준평의 행각에 치를 떨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 준평의 사소한 표정과 눈빛 하나에서 북받쳐 오르는 통한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혐오와 증오에서 연민과 측은함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이 벌인 모든 악행의 근원이 무엇인지, 왜 스스로를 절대 고독속에 던져 넣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놀라운 몰입
캐릭터를 완성하는 것은 캐스팅이다. 감독은 1999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를 촬영 중이던 기타노 다케시에게 직접 원작 소설을 건넸고, 영화화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케시는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신이 해서 되겠나 싶어 처음엔 망설였다는 후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속의 김준평은 키가 183~4 센티에 몸무게가 100킬로나 되는 체격에 벚나무 곤봉을 휘두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구의 남자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케시는 기꺼이 ‘배우’로서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다케시는 육체와 정신을 통제함에 있어 놀라운 몰입을 보여주면서 배우로서의 역량을 재입증했다.
준평의 아내 영희 역을 하기로 작정하고 나선 스즈키 쿄카도 마찬가지였다. 영희 캐릭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준평과 강제로 결혼한 비운의 여인. 남편의 폭력과 무관심 앞에서 가족을 끝내 지키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준평의 횡포에 맞서기 보다는 강한 인내와 생활력으로 자식들과 주변을 자애롭게 건사하는 인물로 20대부터 70대까지 일생을 표현해야 하는 점이 연기자에게는 부담이 될만했다. 6년이라는 제작 기간 동안 배역에 걸맞는 배우가 되고자 꾸준히 연구했다는 스즈키 쿄카는 부드러움 속에 심지를 지닌 연기로 영희 역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평을 얻었다.
괴기한 심야열차 레드아이
감독 : 김동빈
출연 : 장신영, 송일국
1988년 7월16일 서울발 여수행 열차. 사상자가 100여명에 달하는 사상 초유의 열차 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저지른 사고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그렇게 사고는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만다. 16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은 열차의 마지막 운행이 있는 날.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열차는 운행을 시작한다. 빠른 속도로 철길을 달리던 열차는 갑작스레 급정거를 한다. 10분 후 열차는 다시 운행을 재개하지만 열차 판매원 미선은 열차 공간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와인과 사랑에 흠뻑 사이드웨이
감독 : 알렉산더 페인
출연 : 폴 지아마티, 토마스 헤이든 처치, 버지니아 매드슨
와인 애호가인 영어 교사 마일즈는 이혼의 후유증을 와인으로 달래는 남자. 늘 소심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완벽한 와인을 맛볼 때에는 활기가 넘친다. 대학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그의 단짝 친구 잭은 주가가 폭락 중인 배우로, 치마만 둘렀다면 작업 들어갈 만큼 여자에게 중독된 선천적인 플레이보이다. 성격도 외모도 천지 차이인 두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면서 우정을 지속시켜 왔다. 자작 소설을 출판사에 보낸 후 출간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마일즈는 결혼을 일주일 앞둔 잭의 총각파티를 겸해 산타 바바라 지대의 와인농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