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이익을 받아왔던 남성들이 최근엔 여성들의 파워에 그 기세가 눌리고 있다. 학교 전체 성적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앞선다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법조계에서도 여성 검·판사와 변호사들이 종횡무진 누비고 있고, 아직은 보수적인 정치와 경제계에서도 여풍이 일고 있다. 전 분야에 걸친 여성들의 활약은 ‘금녀의 벽’을 부수고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학업 성적 여성이 크게 앞서
예나 지금이나 학업 성취도 면에서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지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우리나라 학생의 2002년 학력수준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초,중,고교 전 교과에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높았다. 과거에 남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수학, 과학 분야에서도 여학생들의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다.
대학가에서는 지난해 모두 7명의 여성 총학생회장이 등장했다. 대학 관계자들은 “최근 성적 우수자와 교환학생 합격자, 수석졸업생 모두 여학생이 절대적 강세”라고 입을 모은다. 대학가 졸업식에서도 여성들이 전체수석이나 단과대 수석을 과점하고 있다. 성균관대는 20학개부 수석 졸업생 중 70%인 14명이 여성이 차지했고, 경희대는 15개 단과대 중 11개에서, 더구나 여학생 비율이 27%에 불과한 의학계열을 여학생이 휩쓸었다. 한국외대와 한국과학기술원은 여학생이 전체수석을 배출했다. 이같은 현상을 대학 관계자들은 여학생들이 취업시 불이익을 우려해 상대적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한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각종 입사시험에서도 여성의 활약은 단연 돋보인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국민·기업은행의 신입행원 채용에선 전체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백화점 등 유통업계 공채도 합격자의 30~50%를 여성이 차지했다. 올해 초 이통업계 여성 신입사원 비율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하나로텔레콤이 45%로 가장 높았고 뒤를 이어 KT 33%, 데이콤 31%, KTF 30%, LGT 29%, SKT 22% 순이다.
법조계 여풍(女風) 강세
여성이 가장 단기간에 남성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간 분야는 국가고시다. 지난해 사법·외무·행정·기술고시, 변리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감정평가사 등 주요 국가자격시험 8개의 수석을 모두 여성이 휩쓸었다. 여성의 합격자 비율도 행시는 40%에 육박했고 사시는 24%, 기술고시는 지난해 11.5%보다 무려 9% 증가해 20%를 넘었다. 여성 특유의 꼼꼼함과 성실함이 남성 위주의 문화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나타난 결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특히 법조계의 여성파워는 가히 ‘강풍’(强風) 수준이다. 최근 7년간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한 여성이 5명에 이르고 올해 사법연수원생 수석 졸업생 또한 여성이다. 사법연수생 중 판·검사 임용에서 여성 비율이 44.6%나 됐고, 20대 검사 59명 중 여성이 52.5%에 달한다. 신임판사의 절반 가량인 47명이 여성이고, 신임검사 95명 중 36명이 여성을 차지했다. 특히 김소영(사시 29회) 서울고법 판사가 대전지법 공주지원장으로 부임하게 돼 여성으로서는 첫 지방법원지원장이 탄생했다.
경찰계에선 역사상 올해 첫 여성 지방경찰청장과 지방 여성 총경이 탄생해 경찰 내 ‘여풍’이 몰아쳤다. 올해 60년 경찰 사상 처음으로 김인옥 경무관이 지방경찰청장(제주)이 됐고 충남지방경찰청에선 송정애 여성청소년계장이 첫 여성 경정의 자리에 올랐다. 대구지방경찰청에서는 설용숙 보안 1계장이 처음으로 여성 총경으로 승진했다. 여경의 활약은 남성 경찰관도 꺼리는 수사분야에 여경들이 잇따라 진출하면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올해 초 도입된 수사경과제가 시행된 뒤 첫 여성 수사과장이 나오고 여경들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군 59년 역사에 군(軍)에서도 여군시대가 열렸다. 현재 69만명 장병 중 여군의 숫자는 4,150여명(0.6%)이며, 하사관 이상 간부 중 비율은 2.3% 정도다. 1997년 공군사관학교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한 데 이어 육사(98년), 해사(99년)도 뒤따랐고 2000년대 들어서는 여군 부사관 모집이 이뤄지면서 여군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IMF 이후 계속되는 불황 탓에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한 결과다. 2002년엔 양승숙 국군간호사관학교장(준장)이 여군 중 첫 별을 달았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올해 육군과 공군에 이어, 해군이 임신한 여군에게 올해부터 근무할 때 입는 특수 제작된 임신복을 지급하기로 했다.
17대 국회 여성의원수 두자릿수 증가
대기업 임원 자리에도 여성이 부쩍 늘었다. 작년 말 삼성그룹 인사에서 신규임권 3명을 합쳐 6명의 여성임원이 승진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은 현재 여성임원이 14명이다. LG그룹도 신규임원 3명을 포함해 9명의 여성임원이 활동 중이다. LG전자의 WCDMA 성공신화의 주역인 류혜정 상무(39)는 이례적으로 30대에 임원을 달았다. 지난해 SK텔레콤 인사에서 최연소 상무로 승지난 윤송이씨(29)도 단연 돋보인다.
대기업 여성 CEO 중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은 가장 주목받는 여성 경제인 대표로 꼽힌다. 현 회장은 남편인 정몽헌 회장이 사망한 후 현대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평범한 주부에서 경영자로 전격 변신했다.
CJ그룹에서는 지난해 말 이재현 회장 누나이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장남인 이맹희 씨 큰딸 이미경씨(46)가 그룹 차세대 사업을 총괄하는 부회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은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선정한 주목할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에 오르면서 화제를 모았다.
17대 국회가 전체 의원정수 299명 가운데 243개 지역구에서 10명이 선출됐고, 비례대표 56명 가운데 29명 등 총 39명의 여성당선자를 탄생시켜 본격적인 여성 정치인 시대를 열었다. 특히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은 여야의 여성 대변인으로 맹활약하면서 양당의 얼굴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성의원수가 제헌국회 후 9대 국회를 제외하고 줄곧 한자리수를 맴돌았던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성과다.
여풍 현상에 대해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조기퇴직 등 조직내부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불리함을 딛고 생존하기 위해 실력과 노력을 배가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면서 “임용고시나 자격증 시험 등을 통해 등용되는 공직 및 대기업에서 여풍이 더욱 거세지는 것도 우수한 여성인력들이 이런 분야를 집중공략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홍경희 기자 metell@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