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여류화가 동초 이현옥 화백에 부쳐
먹의 오색이 빚어낸 산수화 극치, 그림하나로 마감한 졸수(卒壽) ‘삶’
1세대 여류 한국화가인 동초 이현옥화백(東初 李賢玉 1909~2000)이 11월 28일 별세했다. 자신의 죽음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부음 후에야 김영기화백 등 몇몇에게만 알져졌고 신문엔 단 한 줄의 부음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은 생의 후반기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탓이다. 그는 70년대부터 작고직전까지 안양과 수원, 포천에
칩거하며 외부와 단절한 채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의 말년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동초는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화단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으며 걸작을 남긴 화가였다. 충북진천 출생으로
20대부터 그림을 그리리라 마음을 먹었던 동초는 30년대 청전 이상범이 운영하던 청전화숙의 문하생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당시 제국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전문대학이 있었으나 미술과는 없었다. 미대의 역할을 청전화숙과 이당 김은호화백이 운영하는 후소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그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집안에 그림하는 사람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림을 통해 자연을 정복해보겠다는 기개에 찬 생각 때문.
한국화가로는 동초와 최초라 할 수 있는 정용희(鄭用姬, 후에 월북)의 권유로 화숙에 다니기 시작, 둘은 여성작가로 쌍벽을 이루며 재기를
드러냈다. 36년부터 동초는 연 6회 선전(鮮展)에 입선했다. 심사위원 전원이 일본인이어서 입선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고 더구나 한번의
낙선도 하지 않은 것 역시 주목거리였다.
상해미술전문대학 중국화과를 다니면서 그는 자신의 그림세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초는 향원정의 만추(1953년작)작가란 창의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산수화에서 한편으로는 남이 알아볼 수 있는 추상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쉬지않는 실험성을 드러냈다.
동초의 그림을 두고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런 정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작가가
작품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는 남의 것을 많이 봐야 한다. 그러나 일단 자기 세계를 터득하면 남의 것을 많이 보는 것이 자기 세계를 잃는
수가 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하곤 했다.
지루함을 모르는 동초의 작품세계
미술평론가 박래경씨는 1982년 동초 고희전에 부쳐 “전통성이 있으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현대감각이 풍부하면서도 모험에 빠지지 않는 미묘한
특질을 내포하고 있다”고 평했다.
한마디로 동초가 그려낸 산수는 꿈을 꾸는 것같은 환상과 형체를 판별할 수 있는 구상력 그리고 먹의 오색이 빚어내는 색조로 인해 높은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향원정의 만추’라는 작품은 작가의 역사의식도 엿보게 한다. 향원정은 명성황후의 재가 뿌려진 곳. 무참하게 살해된 황후의
넋이 향원정을 떠돌고 있는 것 같다.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뽑은 현대미술
100선에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동초의 다른 대표작 중 하나는 ‘안남비(雁南飛)’. 54년 국전 특선작으로 스케일과 구도가 파격적이다. 당시 4천부를 찍었던 팜플렛을
정작 작가는 갖지 못할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말년의 그를 위로한 것도 그림이었다. 그는 꿈을 꾸듯이 붓을 잡으며 “인간은 자기가 뭔가 하나를 한다는데 보람이 있다. 그것이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림을 하면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성공하든 안하든 한가지에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른다”라고 되뇌었다.
그는 말년에 둘째 아들과 생활했다.
김예옥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