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과 국군포로송환으로 점철된 50여년 미국에서의 삶. 올 해 나이 일흔여덟의 토마스 정(한국명 정용봉) 미주 국군포로송환추진위원회 회장은 6.25전쟁 참전과 1958년 도미이래 오늘까지 자신의 삶이 이 두가지로 모아졌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을 특정 단어로 표현할 순 없는 일이지만 정 회장의 인생에서 국군포로와 가발, 이 두가지를 빼고나면 차라리 허탈할 정도다. 만추의 11월 중순, LA 출장취재중 뜻밖에 만난 정 회장과의 인터뷰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벌써 수십년 전, 한국에선 서너집 건너라고 할 정도로 앞다퉈 소위 ‘머리카락집’이 있었던 시절. 그렇게 만들어 진 가발을 미국에 처음 수입한 사람이 바로 정 회장이다.
경남 김해출신의 정 회장은 6.25전쟁때 장교로 참전했다 종전 후 유학생으로 도미했다. University of Montana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 LA에서 His & Her Company 사장, 샤니 엔 토마스 정 장학재단 이사장, 나라은행 회장과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회장 등 활발한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주목됐다.
그런 그에게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며 절실한 얘기가 하나 있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며 들려준 얘기는 바로 400명의 국군포로, 여전히 남쪽하늘만 바라보며 한을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전우들을 고국의 품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데 고정됐다.
“그들이 모두 죽어버리기 전에 고국을 그리는 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많은 이들이 참여한 전쟁이었지만 모두 간과해 버린 포로가 된 전우들에 대한 절절한 기억. 그는 “사실 국군포로문제는 대한민국의 존재를 긍정한다면 가장 먼저 해결했어야 할 문제”였다고 했다. “이제는 대부분 국군포로들이 남쪽하늘만 바라보며 한을 품고 이 세상을 다 떠나버려 불과 4백여명이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리 정부도 우리 국민도 다 같이 이사람들의 한을 죽기 전에 풀어줘야 하지 않냐”고.
납북자보다 절실한 국군포로 송환
북에서 탈출한 전우들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감전된 듯 멈춰버리던 성공한 실업가의 삶. 미주 국군포로송환추진위원회는 정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국제한국전기념재단의 활동기구중 하나로 지난 2004년 마침내 전격적인 ‘전우구하기’활동을 시작했다.
북한인권법안을 주도한 미연방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과의 국군포로에 대한 인권문제 제기 첫면담이 그해 6월 이뤄졌다. 이어 9월엔 북 인권보호 NGO인 디펜스포럼재단(DFF) 수잰 솔티 회장과 만나 양 단체가 국군포로송환운동을 연대추진키로 합의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1회 ‘북한홀로코트 전시회’를 후원한 정 회장은 마침내 국군포로 문제를 미의회에 제기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4월부터 6월사이 그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북한인권법을 대표발의한 김문수 의원등을 만나 국군포로송환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했다.
정 회장의 전우구하기는 지난 7월 마침내 미의회 상,하원이 ‘국군포로 석방 등 납북자 석방을 위한 대북결의안’을 통과시키는 결정적 동기가 됐다.
“빠르면 UN과 미의회 청문회를 내년 봄쯤 계획하고 있어요. 이 국군포로 청문회에는 북을 탈출한 국군포로들이 증언에 나설 겁니다.” 자꾸 꺼져가는 포로 전우들의 생명의 빛. 그는 하루하루가 그저 아깝고 급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