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동고동락하던 동료의 빈 책상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여기에 구조조정이 수시로 발생하면서 5·6도 4·5정 3·8선(38세 정년)까지 무너졌다.
이로 인해 기업구성원 가운데 50세 이상이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 등 노동력의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청년층의 대학 진학률 증가와 정부의 고령자 고용촉진 장려 등의 정책도 고령화를 부추기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으로서는 연봉제와 인력감원을 통해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 할 상황이지만, 사업체 내 고령자의 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생산량이 감소하는 기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또 강력한 노동조합도 기업으로서는 경비감소의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 근로자의 고용은 보장하면서 임금은 낮추는 ‘임금피크제’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령 근로자 3배 급증
정부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면서 고용안정은 어느정도 해소가 가능하겠지만, 자칫 근로자 임금삭감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종업원 10명이상 비농 전산업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에 따르면 기업내부 인력구성이 고령화되고 있다.
1982년 기업 근로자의 평균연령은 29.6세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36.7세로 7년 이상 종업원의 나이가 높아졌다. 같은 기간동안 20대까지 청년층 근로자가 57.9%를 점유했으나 29.6%까지 대폭 떨어졌다. 반면 50세 이상 고령자는 3.7%(10만명)에서 13.1%(72만명)으로 점유율이 3배 이상 급증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됐다. 이 같은 노동력 고령화 현상은 부동산 임대 및 사업서비스업 광업과 운수창고 및 통신업에서 더욱 심각한 상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노동부 통계를 기초로 산출한 ‘고령화 지수(15~29세 청년층 근로자에 대한 55세 이상 고령 근로자의 비율)’에 의하면 부동산 임대 및 사업서비스업의 경우 1980년 8.4%에 불과했던 고령화지수가 2001년 73.2%로 업자 가운데 청년층이 10명이면 고령자는 7.32명이었다. 이 기준으로 광업 71.9% 운수창고 및 통신업 56.5%를 보였다.
사업체 규모별 고령화지수도 크게 높아졌다. 300명 미만 근로자를 고용한 업체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4∼6.5%로 고령층이 적었지만 2001년에는 23.5%∼27.1%까지 확대돼 중소기업의 고령화가 두드러졌다. 아울러 500명 이상의 사업체도 0.5%에서 7.1%로 크게 늘어나는 등 산업체 전반에 걸쳐 종업원의 고령화가 이뤄졌다.
고령화 기업 부담 가중
현행 대부분의 기업들이 근속연수가 길어지면 임금이 동시에 늘어나는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를 선택하고 있다. 결국 일정 수준의 나이가 되면 생산능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기업으로서는 더욱 많은 임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퇴직금까지 합칠 경우 부담액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기업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 들어 구조조정을 시작한 이후 2001년에는 더욱 활발해져 고령자의 임금 줄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희망퇴직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인건비 절감효과를 실현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종업원의 고용불안과 사기저하로 기업경쟁력에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대중공업은 스스로 직장을 옮기는 근로자도 거의 없어 올해 정년퇴직자는 400여명이지만 2, 3년 뒤에는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 임금관련으로 지속적인 자금출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임금체계 개편 임금피크제
한국노동연구원은 고령화사회를 맞이한 현실을 고려할 때 단기적으로는 60세 중기적으로는 65세 장기적으로는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의욕과 능력이 있는 한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제도 가운데 임금피크제는 그 시작이라고 밝혔다.
김정한 연구위원은 “기업이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서 정한 정년을 보장하되 정년 1∼5년 전부터 임금을 깎는 정년고용보장형 도입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노동부는 연구원의 이러한 의견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임금정책과 임무송 과장은 “제도의 핵심은 적용연령을 해당 기업의 정년 ±몇 년으로 정할 것인가와 임금 하락폭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라며 “정부는 오는 2004년 정년 후 채고용시 1인당 30만원 정도를 6개월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총과 노조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총 노동경제 연구원 김일한 연구위원은 “개별기업의 인적구성과 업종 특성을 고려한 노·사 간의 합의를 통해 추진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면서도 “근로자의 생활이 전적으로 급여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한국노총 이민우 정책국장도 “제도 도입에 앞서 60세 정년을 의무화하고 이후 65세까지 늘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며 “임금피크제는 정규직으로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임금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건비 절감…고용창출로 이어져
한편 지난 7월 신용보증기금은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직책을 없애고 전문업무를 수행하는 별정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다.
신보는 인사적체 해소와 승진기회 확대, 고령자의 사기 제고 및 명예퇴직의 대체제도로 도입한 입금피크제 도입으로 상당한 효과를 봤다고 밝혔다.
신보는 지난 95년부터 총 6차례에 걸쳐 185명에 대한 명예퇴직을 실시했지만 퇴직자들은 회사에 대한 불신감이 높아졌고, 이미지도 떨어져 도입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고용불안이 해소됐고 인사적체 해소와 1인당 4,000만원 가량의 인건비 절감으로 이어져 올해 160명의 신입직원을 채용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신보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대부분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지난 9월 신보가 기금내 직원과 은행 공기업과의 설문조사를 통해 발표한 ‘임금피크제’제도 반응도에 따르면 60% 이상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70% 이상이 명예퇴직 보다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임금피크제는 연공서열을 시행하고 있는 기업에는 상당히 유리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반응이다. 숭실대 조준모 교수는 “연봉제는 개개인에 대한 임금산정을 별도로 해야 하는데 비해 임금피크제는 근속년수로 묶어 급여를 책정, 전반적인 기업의 인력관리에 경제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