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에게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
홍천 금강고속 백승철씨의 ‘아주 특별한 고객서비스’담론
홍천의 금강고속에서
근무하고 있는 백승철(41)씨. 그에게서 오는 첫 느낌은 강력한 에네르기였다. 짧게 자른 머리와 다듬어지지 않은 외모(?)에 비해 고객서비스가
주요일상 중 하나인 고속버스 기사로서 그가 근무한 곳에서는 고객의 친절한 발로써 정평이 나있다. 이에 입사한지 10년 가까이 되어 겨우 좋은
노선을 배정받았지만 몇해전까지만 해도 그는 강원도의 최고 오지인 김부리노선(인제 원통~상남)을 낡은 버스한대로 고정 배차받아 단독운행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여유없는 강원도 산골 (홍천)에서 태어나 어찌보면 인생의 뒤안길 만을 걸어온 듯 하면서도 40넘긴 요즈음의 그에게서는 잔잔한
우수마저 묻어나는것 같다.
인터뷰 내내 “친절봉사”만을 강조하는 그를 운행중인 그의 버스에서 만나보았다.
- 현재 하고 있는 일(職業)과 회사에 대해 한 마디 …
운전은 저의 천직(天職)이지요. 제가 다니고 있는 금강고속이란 회사는 제 운명이고요. 거의 반평생을 회사에 몸담아 왔으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회사와 저는 말 그대로 일심동체(一心同體)아니겠습니까?
- 금년에 회사에 좋은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저희 회사는 인화단결·친절봉사·책임완수라는 사장님(대표이사 이은중)의 사훈(社訓)에서도 보듯이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저희들은 당연히 대고객써비스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또 회사내에서도 노사(勞使)협력프로그램에 따른 노사간 신뢰기반구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그 결과 노동부에서
선정하는 ‘2001년 상반기 신노사우수기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운전기사 된 것은 저의 운명이지요
1979년 강원도 홍천.
어려서부터 개구쟁이로 동네2등이 싫었던 홍안의 소년은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너무 좋아 어느날 불현 듯 운수회사를 찾아갔다. 고향 홍천에
소재한 금강운수가 바로 그 곳. 즉석에서 입사가 허락되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일거리는 정작 그가 꿈꾸던 레이번에 멋진제복의 운전기사가 아닌 정비보조원.
면허증이 없고 취득연령도 되지 않은 그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훗날 아름다운 비상(飛翔)을 생각하며 야간정비시간에도 짬만나면 운전석에 앉곤
했던 그였다.
그리고 어느덧 그의 나이21세가 되었을 때 대한민국 장정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通過儀禮)인 3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건설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러나 운명의 부름(?)은 그를 여기에 오래 머물도록 두지 않았고, 다시 금강운수를 찾아가 재입사 후 현재까지도 이 회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핸들 하나에 그와 가족들의 희망을 건채 오늘도 가로수를 누비며 신바람나는 삶을 살고 있다.
천둥 벌거숭이 같던 유년기
‘힘이 부족해도
깡다귀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술첨지놀보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어릴적 그의 기행(奇行)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의 7∼8세 손위 형들과 어울렸으니
툭하면 얻어맞기 일쑤였고 어찌나 장난이 심했던지 별명 역시 걸맞는 ‘개고기’.
그러나 혹시라도 맞은 것이 불편부당하다 느껴지면 즉각 때린 형집의 우물에 오줌누고 침뱉기였다나…
몇번 이러한 그의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보복이 주변에 회자(膾炙)되자 다시 건드리는 형이 없었고 동네 고샅길은 그의 안마당 독무대였음은 불문가지(不문可知)
그래서 어릴적 그를 기억하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요즘음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의 변심(?)을 의구심어린 눈으로 볼 수 밖에 …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 40평생에 대한 회한(悔恨)과 때늦은 후회, 엇갈리기 일쑤였던 삶·인연 잃은것에 대한 원망등이
근래에 그의 심경변화를 가져오게 했슴직도 하지만 그 깊은 속내를 누가 짐작이나 할까? 이처럼 그의 삶은 60∼7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온 근대화
인생군(群)의 전형적 모습을 닮아 있었고 어렵게 살아온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가난과 으리마져 뺀다면 조금은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어려워도 참되게 살자. 거짓은 생명력이 없다’
때로 배고픈 시절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까지의 그가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활신조 때문이었다.
- 지금까지의 회사생활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김부리 노선에서 일할 때였지요. 승객 몇을 태우고 상남에 닿았는데 어느 손님이 현금 350만원이 든 돈자루를 버스에 두고 내렸지 뭡니까?
이집저집 수소문 끝에 상남 백제동 어느손님의 소판돈이었는데 본인이 술이 덜깨 굳이 아니라고 우기더라고요. 거의 반강제(?)로 되찾아 주었지요.
또 한번은 늦은 밤에 동네 아주머니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해서 동네 봉고차를 제가 몰고 철정 군병원에 급히 가서 검사해 보니 과음이래요.
그분 아들이 믿지않아 다시 홍천종합병원에 와서 재확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김부리까지 되돌아 오니 새벽2시였지 뭡니까? 다음날 운행하면서
얼마나 졸립던지 … 그랬다.
농번기 때면 상남 농협에서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비료를 구입해 버스에 싣고 회차(回車)운행중 논주인들이 요구하는 것마다 손수내려 주기도
했다. 제사상에 오를제물을 사오다 도중 험로(險路)로 인해 수박이 굴러 깨졌고 다음날 다시 사다주자 필요없다며 돈도 안줄 때 묵묵히 돌아서던
그였다. 그리그리 살며 몇 년간 고생하던 김부리노선을 떠나올 때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 주었던 감사패와 벽시계가 그에게는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한다.
큰아들 종훈(13)과 작은아들 종혁(12) 그리고 평생애인 박미라(35)씨와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는 요즈음 부쩍 커가고 있는
아이들 속에서 또다른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단다. 그리고 마지막 여운을 남기는 그의 말 한마디.
“금강고속과 아내 박미라를 죽을때까지 사랑할 겁니다.”
금강고속 이은중 대표가 말하는 백승철 씨“대 고객서비스 몸으로 실천하는 모범사원”-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으로써 백기사.처럼 대고객서비스를 잘해주고 맡은 책임을 완수하는 직원이 바로 저희회사의 사훈과 꼭맞는 사람이지요. 회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신다면 … 저희 (주)금강고속은 6·25동란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52년 6월 강원도 홍천에서 춘천원주간을 다니는 시외버스 3대로 출발했으며, 인화단결·친절봉사·책임완수라는 사훈(社訓)아래 8개직영영업소와 30여개의 기숙사, 60여개의 지정식당을 운영하며 주로 강원도 및 중부지역 IMF여파등으로 회사운영에 어려움도 많을 것 같은데 … 저희 회사는 향토기업으로서의 지역사회기여를 위해 강원 및 경기지역오지노선 40여개를 적자운행하고 있으며, 작년에도 185명의 신규사원을 다만 아쉬운 것은 개인 승용차의 급속한 증가와 타운송수단의 무분별한 진입으로 인한 승객감소. 유가인상에 따른 재정악화요인이 누적되고 있는 |
김승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