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올해 한국은 누드 공화국이었다. 연예인들은 경쟁적으로 누드 화보집을 냈고, 브라운관은 온통 섹시 컨셉으로 가득했다. 대중문화뿐만이 아니다. ‘리골레토’ ‘봄의 제전’ 등 공연무대도 누드 바람에 거셌다. 누드 광풍은 일상으로 이어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셀프누드 사진이 네티즌의 ‘평가’를 기다리며 인터넷을 떠돌았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성의 상품화와 보편화가 극대화된 상황. 10대 조차 여배우의 벗은 몸에 시큰둥해질 지경으로 넘쳐나는 누드 홍수 속에서 왜곡되는 성의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올해는 누드 원년. 누드도 의식도 진보할 것이다.
이효리
2003년을 뜨겁게 달군 올해 최고의 ‘섹시 퀸’은 단연 이효리. 애교 넘치는 눈웃음과 건강한 구릿빛 피부, 풍만한 몸매, 재치 있는 말투, 당돌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효리는 매력적인 현대 여성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패션과 화장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마니아들이 양산됐고, ‘효리처럼 예쁜 가슴 갖고 싶다’는 욕망은 가슴 성형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효리 신드롬은 언론과 기획사의 합작품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교모하게 꾸며진 이미지와 끊임없이 가십을 만들어내는 고도 상술의 결과라는 것. 스타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녀의 가창력과 대중의 관심도가 균형이 너무 맞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얼짱
‘얼굴이 짱’이라는 해설의 단순함과 달리, ‘얼짱’은 다양한 코드들을 담고 있는 복합 아이콘이다. 인터넷과 디지털카메라 등의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네티즌 문화와 외모지상주의, 문화적 관계와 서열의 역전 등 한국 사회의 단면이 ‘얼짱’ 신드롬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2003년 한국인들이 ‘얼짱’에 열광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예쁘고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스타를 창출해낸다는 자부심과 얌전히 주는 것을 받아먹는 수용자로만 남지 않겠다는 자발적 의지가 얼짱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하위문화가 생산한 ‘얼짱’은 다시 기성 문화 권력인 연예산업에 종속된다는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대장금
시청률 50%를 몇 차례 웃돌며 국민적인 드라마로 화제가 된 ‘대장금’은 단순한 드라마를 넘어서 문화적 이슈를 몰고 다닌 하나의 ‘현상’이 됐다. 소설 만화 동화 동명작품이 출간됐고, 모발일 게임과 휴대폰 배경화면으로도 제작돼 사랑 받았다. 주제곡은 휴대폰 벨소리로 애용됐으며 궁중음식 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상궁 역으로 출연한 양미경은 연기생활 20년만에 신데렐라로 떠올랐고, 연생 역의 박은혜가 스타덤에 올랐다. 이영애는 흥행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대장금’은 ‘허준’에 이어 서민영웅의 성공담이 대중에게 먹힌다는 공식을 재차 입증했다. 또한, ‘다모’ ‘황산벌’ ‘스캔들’과 함께 2003년 영상문화의 새로운 흐름인 퓨전 사극의 대표작이 됐다.
사투리
2003년 한국은 구수한 사투리로 가득했다. 2001년 ‘친구’를 효시로 꾸준히 상승세를 탔던 사투리는 올해 대중문화 흥행코드로 명확히 자리를 굳혔다. KBS 개그콘서트의 사투리 개그 ‘생활 사투리’가 시청자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김제동 강호등 등 사투리 MC가 인기를 끌었다. 사투리 관련 동호회마저 우후죽순 생겼다. 주연배우들이 사투리를 쓰는 드라마나 영화도 급속히 늘었다. ‘황산벌’ ‘선생 김봉두’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등의 영화에서 사투리는 관객몰이의 장치로 활용됐다. 사투리 열풍은 비주류를 주목하는 21세기 문화적 흐름과 상통한다. 하지만 지역정신을 담으려는 노력 없이 희화화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아쉽다.
살인의 추억
전국 540만명이라는 ‘살인적인’ 흥행기록에 국내외 영화제까지 휩쓴 ‘살인의 추억’은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행복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태인 연극 ‘날 보러 와요’ 또한 관객동원에 성공했고, 시나리오와 스틸 사진을 엮은 단행본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흘러나온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도 새삼 관심을 끌어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무엇보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다시 소개되는 등 재조명의 계기가 됐다. 범인에 대한 각종 추리의 글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덮었고, 재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디지털 카메라
디카(디지털 카메라)와 폰카(핸드폰 카메라)의 일상적 사용은 새로운 문화적 지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형은 점차 확장되는 추세다. 즉각적인 이미지 생산과 복제 수정 변환 저장이 용이한 디지털 기기의 특징은 네티즌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끊임없이 새로운 기호들을 창조했다. ‘얼짱’ ‘딸녀’ 등의 신드롬은 디지털 카메라라는 자기표현 수단이 불러온 대표적인 문화적 현상. 합성사진을 비롯한 각종 사진들과 댓글로 완성되는 네티즌 문화는 시대의 비판과 욕망을 드러내는 거울로 작용했다.
올인
하반기를 사로잡은 드라마가 ‘대장금’이라면, 상반기는 SBS ‘올인’이 지배했다. 극중 주인공이 주고받은 ‘오르골’은 쇼핑몰의 인기상품으로 떠올랐고, 드라마 배경이 된 제주도 관광지는 특수를 누렸다. 주제곡은 벨소리와 컬러링 순위 상위에 링크됐다. 특히 ‘올인’은 프로도박사와 카지노 딜러를 비롯, 도박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온라인 도박게임 업체도 올인효과를 톡톡히 봤다. 무엇보다 ‘올인’은 ‘이병헌-송혜교’라는 대형 스타 커플을 탄생시켜 종영 이후에도 뜨거운 이슈가 됐던 드라마다.
폐인
MBC 퓨전 사극 ‘다모’는 드라마 자체보다 ‘다모폐인’으로 더 유명했다. ‘폐인’이란 무언가에 중독돼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사람을 일컫는 네티즌 용어. ‘다모폐인’은 드라마 ‘다모’의 마니아 집단으로 ‘다모’ 사이트 게시판을 종일 머무르며 ‘∼하오’ ‘∼했소’ 등 ‘다모체’ 말투를 사용하고, ‘다모’를 소재로 한 가상 인터넷 신문과 팬픽(팬들이 작품 속 캐릭터를 이용해 만드는 픽션)을 제작하는 등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드라마는 시청률 20% 정도가 상한선이었지만, 팬덤 규모는 사상 최대였다. ‘다모’ 사이트 게시판에는 ‘폐인’들의 게시물 수가 100만건을 돌파해 수시로 서버가 마비됐고, VOD(다시보기) 서비스 이용 건수 또한 40만건으로 iMBC 유료화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다모폐인’의 이상기류는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폐인 마케팅’이 유행하기도 했다. 1997년 ‘거짓말’로 시작된 ‘마니아 드라마’의 절정이 ‘다모’였으며, ‘다모폐인’은 문화 소비자의 문화 재생산의 극치를 보여준 긍정적 사례로 평가된다.
최진실-조성민
“깨가 쏟아지듯 살고 싶어요”라던 최진실-조성민 커플은 2002년이 끝날 무렵 결혼 2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벽두부터 신문 연예면은 양측 주장의 발언대가 돼, 치열한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그들보다 자극적이었던 파경은 손광기-이경실. 남편 손광기의 구타로 이경실이 입원한 사건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고, 가정폭력 문제가 사회 전반의 이슈로 대두됐다. 이외에도 배인순이 전 남편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사생활을 폭로한데 이어 고현정의 이혼 소식이 전해져 재벌-연예인 결혼의 그늘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특히 배인순의 폭로와 “성상납 요구받았다”는 장유화의 고백, 연초의 ‘H양 비디오’ 사건 등이 겹쳐 연예인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된 한해기도 했다.
평론가들이 말하는 ‘2003년 문화계’ |
“외국 작가들은 빛났고, 국내 작가들은 암울했다” 최병식(미술 평론가) 최근 5∼10년 사이 지속적으로 진행됐던 영상 설치 분야의 강세와 장르해체 양상이 보다 가속화된 점이 올해의 경향. 특징적인 면은 다양한 외국 작가들의 전람회가 잇따라 열린 것이다. 빌 비올라, 아니시 카포 등 최근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작가들이 빛난 것에 비해 국내 순수미술계는 의기소침한 한해였다. 미술품양도소득세, 예체능 내신성적 제외 등 일련의 사건들로 미술계가 시끄러운 상황에서 지원은 거의 없어 작가들의 창작 의욕이 저하됐다. 특히 세계화 시대에 필수적인 생존 요소라 할 수 있는 독창성과 정체성, 전통에 대한 탐구 없이 서구의 껍데기만 좇아가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어 안타깝다. “자기계발서 히트, 독서 운동의 본격화” 이권우(출판 평론가) 출판계는 불황이 극심한 가운데 자기계발서가 히트했다. ‘아침형 인간’과 ‘10억 만들기’에 관한 책들이 인기를 끌며 불황시대에 대중들이 좋아하는 책의 유형을 잘 보여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인문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와 ‘우리 역사 최전선’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 출판사 ‘푸른 역사’의 책들이 독특한 기획과 우수한 내용으로 인문서적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높았다. 국내의 스타 작가들의 작품이 시장에서 맥을 못춘 반면 번역된 외국소설이 잘 나간 점도 눈에 뛴다. 독서 운동의 본격화도 특징적 현상이다. 서산시의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이 성공적으로 펼쳐졌고, 독서운동 시민단체 ‘책읽는 사회’와 함께 MBC ‘느낌표’ 제작팀이 공동으로 추진한 ‘기적의 도서관’ 제1호가 전남 순천에서 문을 열었다. ‘2003년 파주 어린이책 한마당’ 행사 또한 주목할만 하다. 장삿속 축제에 한정됐던 과거 책 관련 행사와 달리 도서를 문화적 대상으로 확장시킨 행사들은 암울한 출판계에 희망적 징후였다. “양현석과 이효리의 해” 임진모(대중음악 평론가) 대중가요계는 깊은 수렁에 빠진 한해였다. 음반보다는 음원과 공연 쪽으로 옮겨진 해이며, 인터넷 음악 서비스가 유료화 양상을 보였다. 대중가요계에서 올해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로는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와 이효리를 들 수 있다. 양현석 대표는 세븐 빅마마 휘성 거미 렉시 등 올 한해를 주름잡은 가수들을 기획했고, 이효리는 한국 가요계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