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부가 ‘개성공단 사업의 지속’을 천명하긴 했으나, 안도하긴 이르다. 유엔의 대북제재와 추가 핵실험에 대한 불투명으로 정치적 기류가 어찌 변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개성공단 사업은 순수 민간사업으로 북핵과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부분이 중소 제조업체로 개성공단에 거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한 기업들로선 정부가 ‘한 가닥 희망줄’이다. 하지만 줄은 낡고 썩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외줄타기’ 분위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한 모습이다.
개성공단, 북핵 여파 없었다
최근 정치권의 ‘춤 파문’에 대해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개성공단 사업 의지’라는 본질은 보지 못한 채 정치공세로 몰고 가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의견.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춤 파문’에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의 ‘춤’ 사건을 들추며 맞불을 놓은 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근태 의장이 온 날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L기업 대표는 “우리 기업들은 생사기로에 서 있는 마음으로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잘 하라고 격려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북한과의 친근감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잠깐 일어나 흥을 돋군 김근태 의장이 무슨 죄가 있냐”며 “정치공세로 본질을 호도하고 언론이 더 자극적으로 몰고 가는 거 같다”고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툭하면 말 바꾸기를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크다. 그는 “정치인들이 개성공단 다녀가며 격려해주다가도 핵실험 발표난 후 말 바꾸기 하는 걸 보면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다”면서 한미 FTA협상단을 불러서 개성공단이 포함돼 한다고 주장하던 한나라당이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을 철수해야 한다고 말을 바꾼 것을 예로 들었다.
북한의 핵 실험 이후 촉발된 위기와 공포를 개성공단 현지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북한의 특수성 때문인가. 정작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기업들은 남한에서의 우려와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상반된 현지 분위기를 전한다. 실상 개성공단에선 북핵 여파는 없었다. 봉제의류업체인 L기업의 개성공단을 담당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온 나라가 당장 어떻게 될 것처럼 난리들이지만 막상 북한 현지 분위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잘 돌아간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몇 군데에도 확인해 봤으나,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실상 남한에서만 난리법석이지, 개성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라고. 개성공단 기업협의회 이임동 사무국 부장은 “개성공단의 생산 활동은 이상하리만큼 동요 없이 진행되고 있다”며 “핵 실험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현지는 별 반응이 없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한다.
남과 북의 ‘무언의 약속’
사업이 중단된 것도 아닌데 잔잔한 파도에 왜 돌을 던지겠냐는 조심스러움이다. 북한이라는 특성상, 서로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작용한다. 550여명의 북측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T기업의 실무자는 “북측 근로자도 그렇고 우리쪽 근로자도 그렇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북한의 핵문제 등에 대한 얘기는 서로 암묵적으로 일체 하지 않는 걸로 돼 있다”고 말했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되지, 정치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 셈이다.
여기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나, 개성공단 사업이 중단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공존한다. 개성공단이 있는 한 북한의 위협은 없다는 나름의 분석이다. 이임동 부장은 “북한이 개성공단을 나가라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마찬가지다. 신뢰로 맺어진 개성공단이 무너지면 그게 더 위협”이라며 “현재의 불안요소는 미국 때문”이라고 탓을 돌린다.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을 하면서까지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이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은 되레 언론이나 정부가 사태를 확산, 과대 포장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북한이 악감정을 가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인 T기업 담당자는 “현지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괜히 정치권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언론이 위기감을 부채질 하는 것 같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움직임에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은 전화공세를 퍼부어 사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만일의 경우에도 정부만 믿고 하라고 시작했으니, 다소 위험부담은 안고 있지만 정부가 일정의 책임을 질 것이라는 계산도 들어간다. 사업의 지속의지와 중단에 따른 대책 마련을 정부에 재촉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남겨진 자’와 ‘떠나는 자’
개성공단에서 제2의 부활을 꿈꾼 기업들로선 대북 움직임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아 사업의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한다. 그렇다고 정부의 특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특혜라면 싼 이율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이곳에 진출한 업체들은 대부분이 이런 어려움을 안고 가는 대신, 인건비와 세금, 분양가가 낮다는 장점을 선택했다. 개성공단의 월 평균 인건비는 57,5달러로 중국 100~200달러, 베트남 60달러에 비해 최저에 속한다. 세금은 최대 14%로 중국 특구의 기업소득세 15%보다 낮다. 평당 분양가는 14만9,000원선으로 한국 평균 대비 37%선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최근 개성공단 입주 신청률은 5대1에서 9대 1로 치솟았다.
하지만 개성공단 사업에도 ‘남겨진 자’와 ‘떠나는 자’는 각기 이익에 따라 다른 행태를 보인다. 개성공단에는 현재 15개 기업이 시범단지 내 준공을 완료했고 10개 기업이 1차 단지 공사에서 착공한 상태.
이미 개성공단에 투자를 하고 입주해 있는 업체 입장에선, 믿는 건 정부뿐, 무조건적인 사업의 지속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국제정세와 정치적 이유로 사업을 중단할 순 없다는 것. 하지만 추가 투자가 필요하거나 입주가 예정된 업체로선 지금이라도 발을 빼고 향후 추이를 지켜보는 편이 낫다는 계산을 한다.
이에 따라 북핵 사태 이후 개성공단 사업 진출을 잇달아 보류 또는 포기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개성공단에 30억원을 투자해 구두 공장을 세운 P기업은 당초 10월 중순께부터 시험 가동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북핵 사태로 사업 추진을 ‘보류’한 상태다. 5,000만원에 공장부지만 사놓고 10월부터 공장 착공을 하기로 했던 L기업은 ‘올스톱’ 결정을 내렸다. 국제 정세와 정치권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착공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 이 업체 사장은 “그나마 우리는 땅값만 지불했을 뿐이지만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당연히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개성공단에 아파트형 공장을 짓고 있는 산업단지공단 개성사업소는 토지공사의 개성공단 본단지 2차 분양 직후인 10월 말 분양공고를 낼 예정이었으나, 토공 측의 무기연기로 우리도 입주업체 모집을 미룰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의류판매업협동조합연합회와 동대문관광특구협의회도 대북정세가 악화되면서 사업을 무기한 연기했다.
한국산 인정 없어도 걱정 NO!
미국의 대북 제재 압박으로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문제는 거의 물 건너갔다.
하지만 한국산 인정이 안 되더라도 크게 어려움은 없다는 반응이다. 대부분이 내수용으로 개성공단에서 반제품을 만들면 국내서 완제품으로 생산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수출도 원산지 저촉을 받지 않는 국가가 대부분이여서 타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다만 미국시장에 진출해 이익을 더 크게 남길 수 있다는 메리트는 포기해야 한다.
개성공단 제품을 모두 국내 내수용으로 소화하고 있는 의류업체 신원은 “개성공단 제품의 품질이 좋아서 향후 생산을 늘려 미국 수출용으로 해볼까 생각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수출 자체가 어렵게 돼 내수용 공단으로만 남아야 할 것 같다”고 아쉬움을 말했다. 시계제조업체인 로만손도 “수출이 중동과 터키, 러시아, 동유럽 등으로 원산지 저촉을 받는 나라들이 아니지만 미국에도 수출할 수 있기를 바랐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산 불인정’의 문제는 미국 시장 진출 무산보다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다른 수출국들이 덩달아 개성공단 제품의 원산지 인정을 거부하는 상황이 더욱 걱정된다. 개성공단기업협의회 이임동 부장은 “입주기업들이 대부분 원산지 인정 문제 때문에 개성공단에서는 완제품보다 반제품을 만들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번 한미 FTA에서 원산지 인정이 되면 미국에 완제품을 수출 할 희망을 가지고 진출한 기업들이 상당수일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