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통일을 빚으려 합니다”
강원도 목부 김상수씨 2001 한국칠공예대전 대상받아
한지는 99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용하는 사람이 100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날에는 한지를 백지(白紙)라 부르기도 했다. 바로 우리민족의 삶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공예기술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에 살고 있는 김상수(42)씨. 2001년 6월 20일 우리나라 옻공예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원주에서 개최된 ‘2001 한국칠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바로 그이는 이러한 우리나라 전통 옻공예의 장인정신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그가 이번대회에 출품한 “초충문양건칠항아리”는 ‘형체에서 문양·색상 할 것 없이 옛날 조상들이 빚어낸 토기의 형상을 연상하게 되는 중후감을 감지하게 되며 색상의 조화로서 칠기에서 흔히 감지되는 유아독존적 자세와 차가움·더하여 도도함이 아니고 마냥 후덕스러우며 형체·색상 진행과정에서마져 훈훈함을 자아내는 균제가 잡힌 보기드문 덕스러움을 함축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옻은 수천년 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애용했던 무공해천연도료이다. 특히 옻은 우수한 내구성과 방청·방오(防汚)·방부·절연·내화학성등 다양한 기능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옻공예의 본향 원주
원주 옻의 유래는 조선초기부터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33년에는 조선 총독부에 의해 ‘옻나무 증식 10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전국에 시험식재를 하였다. 그 결과 전국에서 원주지역의 옻이 가장 우수하게 판정되면서 원주군 판부면에 옻나무재배시험지를 설치했고, 원주지역 9개면 52개리(里)에 옻나무 150만그루가 식재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침(浮沈)을 거듭하던 원주지역의 옻공예는 이의 활성화를 위해 ‘원주칠 정제연구소’가 운영되면서 일사 김봉룡(一沙 金奉龍, 작고)선생등 유명한 칠기 기능보유자들이 전국에서 원주로 이주해 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원주옻의 우수성은 옻나무 수종보다는 치악산과 태백산이 남북으로 가로 놓인 분지형상의 이 지역 고유 지형과 대륙성 및 해안성 기후가 교차함으로써 지표면에 습기가 적게 공급되는 기후 및 토질등의 여건이 옻나무 생육에 양호한 원주지역의 환경생태적 특성 때문이다.
26년, 칠기 명장에의 일념이 남긴 흔적들
1975년 서울, 10월유신이후 막바지를 치닫는 국내·외의 혼미한 정치적 상황과 ‘빈익빈 부익부’의 계층별 차별화가 뚜렷한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김상수에게 삶이 주는 화두는 버거운 무게로 다가왔고 그러한 시대의 한귀퉁이에서 그져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살수 있다는 생존의 논리만이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서울의 신설동부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구단지로 자리잡아 있었고 그 부근을 기웃거리던 그에게 장인에로의 길을 걷게 해준 사람은 국전초대작가이자 ‘나전칠장’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인 ‘우석 김태희’선생. 1979년부터 우석 밑에서 나전칠기를 사사받던 김상수는 1990년 3월 결혼을 계기로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옻공예가 한창이던 원주로 옮겨 오게 된다. 원주에는 「원주칠 정제 연구소」가 운영되면서 우리나라 나전칠기의 대표적 산지인 경남통영출신 일사 김봉룡(1902∼1994)선생과 그의 제자 및 주변의 공예인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다. 인간문화재 제10호인 ‘나전칠기장인 김봉룡’선생이 고향인 통영을 떠나온 것은 옻칠이 우수한 원주에 이주하여 나전칠기 제작과 후진양성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배움에의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에게 장인의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성가하면서 아이들이 태어나자 가장으로서의 책임 역시 면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대로 했다. 여름철이면 원주인근의 교차로나 I/C, 고가밑의 상권(?)이 보장된 곳이면 1톤 화물차에 과일을 싣고 가서 팔고 있는 그를 볼수 있었고, 겨울이면 아는 선배의 도움으로 500ℓ정화조 물통에 빙어를 싣고 강원도와 충북 일대의 횟집들을 찾아 다녔다. 오뎅장사며 떡볶이, 철판구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와 방황이 이어지고 현실과의 괴리감 가운데 객석에 나앉아 바라만 보던 무대위의 주연들은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억조차 하기 싫은 IMF한파가 몰아치자 그 모든 것들마져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약간의 여유있는 집터에서 종내는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어려움으로는 명인에의 일념을 꺾을수 없었고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밤이면 나전칠기·칠화칠기를 향한 배움의 열정을 불태워 왔다.
이러한 그에게 작년 8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옻의 본향이라 할 원주시가 문화관광부 및 강원도의 후원으로 ‘2001 한국 칠 공예대전’을 개최할 것이라는 낭보였다.
그는 즉시 함께 연구하며 가르침을 주던 스승들을 찾아 상의하고 준비에 들어 갔으며, 9개월 가까운 각고의 노력 끝에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특히 그에게 가르침을 준 ‘양유전’선생은 일사 김봉룡명인의 제자로 옻칠에 여러 가지 색안료를 혼합하여 다양한 문양을 장식하는 칠화칠기의 칠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이 분야의 대가로 손꼽히고 있다.
인터뷰 옻의 본향 원주에서 나전·칠화칠기의 명맥 이어가고파
수상작 ‘초충문양 건칠항아리’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면. 앞으로 활동계획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김승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