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곤 선생은 "악기는 다른 공예품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초고의 소리가 나기 위해서는 만드는 이의 정성, 연주자의 정신이 합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
가야금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잡다한 사념들이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다다른다. 마치 자연과 합일되는 듯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가슴엔 평안이 찾아든다. 가야금만이 아니다. 거문고 해금 아쟁 등 전통 현악기는 이상하리 만치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경쾌한 음악을 연주할 때조차 그 음색에는 가슴에 응어리를 지닌 듯 애처로운 빛깔이 묻어나고, 그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고 다스린다. 악기를 만드는 이의 눈물과 땀, 영혼이 스며들어 있어 그러한 신비의 소리가 나는 건 아닐지….
최초의 개량거문고 ‘다류금’
‘띵 띠딩 띵’하는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소리가 아닌 제 원래 음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고흥곤(50) 선생의 작업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마련된 이곳에서 고 선생은 가야금과 거문고, 양금 등에 둘러싸인 채 작업에 열중이었다.
정악가야금(1982), 21현 개량가야금(1984), 18현 개량가야금(1986) 개발로 국악기 발전에 기여해온 고 선생은 얼마 전 개량거문고 ‘다류금’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전통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둔탁하고 음량이 적다하여 북한에서조차 악기 편성 시 제외시키곤 하는 거문고를 최초로 개량한 것이다.
“기존 주법을 바꾸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으면서, 음량과 음역을 확장시켜 다른 악기와 편성했을 때 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야외나 큰 무대에서 연주하기 힘들었던 단점을 보완, 널리 쓰일 수 있게 했습니다.”
지난 11월12일 국립국악원에서 초연행사를 가진 후, 거문고 연주자로부터 “소리가 깨끗하고 여음이 길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다류금은 고 선생의 5년간 피땀어린 연구결과다.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다류금은 줄을 받치는 괘 1개를 추가해 17괘로 제작, 턱턱거리는 소리가 나 전통음악에서 사용한 적 없는 16괘의 고음을 쓰이도록 했다. 또한 몸통에 많은 구멍을 내 공명이 커졌고, 뒤판 홈을 길고 널찍하게 파내 소리가 막힘 없이 시원하게 빠져나온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전통 거문고의 특성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지나친 변형은 삼가면서 산조, 정악 외에 민요창 음까지 낼 수 있게 했죠.”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됐을 당시의 풍류가야금. |
완성되기까지 700번 손길
현재 고 선생이 만들고 있는 악기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양금 아쟁 등이다. 현악기는 대개 울림통을 오동나무로 만들고 밑판을 밤나무나 소나무로 제작하는데, 오동나무는 필시 30년에서 50년 된 국내산을 이용한다. 그래야 나무가 강하며 틈이 없고 좀을 먹지 않으며 울림이 좋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조건에 맞는 나무를 구하면 비와 눈을 맞혀가며 5년 이상을 묵힌다. 이때 썩고 갈라지는 재료는 버리는데 반 이상이 폐기처분된다. 살아남은 나무는 성질에 따라 두께에 차이를 둬 대패로 다듬는다. 보통 완성되기 전까지 500∼700번의 손이 간다.
“대패질 톱질 칼질 줄질 사포질 하나하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두께가 일정치 않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거든요. 모든 단계를 거쳐 최상의 음색을 내는 악기는 처음의 5%에 지나지 않습니다.”
줄은 명주실을 꼬아 만드는데 보통 마흔 가닥을 촘촘히 꼬아 한 가닥을 만든 후, 소나무 방망이에 감아 수증기에 30분 정도 쐰 다음 건조시킨다. 그래야 잘 끊어지지 않고 탄력이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줄을 걸고 장식을 한 후 낙관을 찍으면 비로소 완성품이 탄생된다.
“1년에 25개정도 만드는데 다 만들었을 때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도 나고 때로는 회의감도 듭니다. 악기는 다른 공예품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요.”
해금 |
사라진 정악가야금 복원
고 선생이 악기를 만든 지 30여 년. 이웃에 살던 명장 김광주(1984년 작고) 선생의 권유로 시작한 일은 이제 평생 업이 됐다.
“당시에는 전기톱이 없어 나무 베는 것도 손수해야 했어요. 그리고는 손이 부르트도록 대패질을 했는데 너무 힘든 과정이라 같이 시작한 동기들이 참 많이 그만뒀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힘은 드는데 그래도 좋더라고요. 악기공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나 봐요.”
단순한 제작이 아니라 복원과 개량에 관심이 많았던 고 선생은 1976년 착수해 1982년 풍류가야금이라 일컫는 정악가야금을 복원했다. 당시 산조가야금이 보편화됐던 터라 찾는 이가 거의 없고, 작업 또한 손이 많이 가 자취를 감춘 정악가야금을 전문가들의 자문과 일본 정창원에 보관됐던 신라의 현악기를 찾아내 되살린 것이다.
“쓰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연구할 필요가 있냐는 핀잔도 들었죠.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가 알고, 지금까지 제가 만든 100개정도가 어느 것 하나 안 쓰이는 게 없을 정도로 가야금 연주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풍류가야금의 원류를 밝혀내고 복원했다는 것, 제 인생 최고 자랑거리입니다.”
지금도 하루 꼬박 12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하는 고 선생은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국악을 듣는다. 특히 황병기 선생의 연주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악기를 가장 잘 다루기 때문이다.
“악기는 사람과의 궁합이 제일 중요합니다. 만드는 이의 정성, 연주자의 정신이 모두 합치될 때 최고의 악기가 탄생하고, 최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법이죠. 악기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아름다워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