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는 통권 299호에서 경기대 조병로 사학과교수의 목소리를 통해 남한산성의 왜곡 된 역사와 유래에 대해 알아봤다. 지난 호에 이어 남한산성에 대한 왜곡된 정보, 숨겨진 이야기 등에 대해 들어봤다.
유럽 등 세계의 많은 성들은 지배계급, 즉 왕족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지배계급을 위한 성이 아닌 백성을 위한 성으로 출발했다고 하는 데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임진왜란이후 남한산성을 재축성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잘못하면 임금과 양반 지배계층이 피난처로 삼고자 했다하여 지배계급을 위한 성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에 따르면 남북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외적을 물리치고 유사 시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강화도보다는 남한산성이 유리하다는 판단아래 옛 성곽을 보수하고 행궁과 여러 가지 부대 시설물을 건립하여 유비무환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성을 축성하거나 지키기 위하여 부근의 지방 군사들을 동원하였으며, 심지어는 지방 사찰의 승군까지 징발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임금과 백성이 같이 막는 君民攻防의 산성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유사시에 대비해 광주 읍치와 백성들을 같이 옮겨 생활하게 함으로써 숙종 때에만 약 4천여 명이 거주했던 국내 유일무이한 산성취락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성 안에는 남성동, 북성동이라는 촌락을 이루어 소금과 숯,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를 많이 지어 싸우고 생활하는 둔전둔수(屯田屯守)의 산성으로서 군사 및 주민생활을 돌보는 행정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이 하나가 되어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화(人和)가 오히려 험한 성곽보다 더 견고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의 남문 이름을 지화문(至和門), 객관을 인화관(人和館)이라 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남한산성이 유래 된 이후 가장 부곽 된 시대는 어떤 때이며 시대적 배경은 어땠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남한산성이 산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가장 부각된 때는 아무래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시기이다. 남쪽의 왜적을 방어하고자 선조 때 유성룡 같은 신하는 도성 방어를 위해 일찍부터 옛 성곽을 보수하여 대비하자는 남한산성 수축론을 주장하였으며, 일부 강화도 선(先)방어론을 주장하는 여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남한산성 재수축론을 수용하여 정묘,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기 일제의 만행과 폭거 앞에 광주지역에서 가장 처절하게 항거했던 곳이 또한 남한산성이다. 그래서 산성주민을 산개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현재의 경안천 부근으로 치소를 옮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일제는 철저히 남한산성 주민의 저항 근거지를 말살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일제 강점기 시대를 지나 1950년 대 이후 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지만 4·19 민주화 운동 후 제2공화국 때 남한산성 국립공원 지정이 무효화 됐다. 하지만 70년 대 초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주민들의 호소로 1974년 광지원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해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됐다. 이 후 활발한 정부의 노력과 맞물려 국민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는 문화관광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에 얽힌 설화 <하늘도 감동한 정남이>
북문 안에 효자 우물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다. 이 효자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수 백년 전의 일이다. 산성 북문 안 마을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효자의 이름은 정남이라고 하는데, 정남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아버지가 하루 하루 품을 팔아 사는 가난한 살림에 갑자기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눕게 되자, 집에는 밥을 지을 쌀이 떨어졌다. 정남은 자신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 겨우 열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으로서는 품을 팔수도 없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아주머니, 아버지가 병들어 그러니 밥 한 술만 주십쇼. 아버지의 병만 나으면 제가 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남은 쪽박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정남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동정했다. 정남이 이렇게 동냥을 해다가는 병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진맥을 보게 되었다. “얘야, 네 아버지의 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 없다. 그저 큼직한 잉어를 구해 다 푹 과 드리면 깨끗하게 나을 것이다.” 하고 훌쩍 가버렸다.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정남은 무척 기뻐하며 아버지께 이야기 한 후 잉어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혹시 생선장수라도 만나면 사정을 해서 구하리라 생각하고 생선장수가 있을 만한 곳마다 정처 없이 헤매었다. 그러나 때가 마침 겨울철이었다. 천지만물이 꽁꽁 얼어붙었고 매서운 바람만 윙윙거리며 불고 있었다. 너무 혹독한 추위, 아무리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생선장수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산기슭을 지날 때였다. 인가도 없는 그 곳에 우물하나가 있었다. 정남은 우물 옆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느님, 제발 잉어 한 마리만 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남은 우물 옆 산기슭에 주저앉아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했다. 기도를 올린 후 다시 걷기 시작하여 우물가를 지나려니까 우물 속에 누런 금비늘이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있는 것이다. 정남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잉어를 잡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잉어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간신히 건져냈다. 뜻하지 않게 잉어를 얻은 정남은 너무나 기뻐서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하늘을 향해 감사를 올렸다. 잉어를 구해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온 정남은 솥에 넣고 정성스럽게 고았다. 다음 날 잉어 국을 맛있게 먹은 그의 아버지는 과연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러한 사실은 차츰 근처 마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남의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성을 칭찬했고 그런일이 있은 이후부터 그 산기슭의 우물을 ‘효자 우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남한산성 홈페이지
http://www.samhansansun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