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시간만큼 깊은, 거장의 경지
고희기념 회고전에서 만난 조각가 최종태
해방 후 성장한 1세대 조각가 최종태의 고희기념 회고전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석재, 청동, 목재 조각에서부터
파스텔, 매직, 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얼굴작품들을 근작 중심으로 140여점 선보였다.
최종태 조각은 정면의 직선적 느낌과 측면의 양감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한 작품에서 다양한 감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 정면의 날렵한
긴장감은 측면의 도톰한 곡선으로 중화되면서 종교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조형적 탐구의 산물이 ‘얼굴’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작가의 내면과 세계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조각들마다 표정이 다르고, 시대상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70, 80년대 작품이 어두운 데 비해, 최근의 조각들은 밝다. 이 밝음에는 ‘부정을 뛰어
넘고 체득한, 삶에 대한 긍정’이 상당한 깊이로 담겨 있다.
이에 대해 김종화 가나아트갤러리 이사는 “선생은 어떤 구호를 형상화하는 조각을 한 적이 없다. 목적성을 가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선생의
사상에 깊이가 더해지면서 타인의 시각과 합일점에 이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전시장에서 관람을 끝내고 조각가 최종태를 만났다. 경건하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며 천진난만한 순수성이 그의 얼굴 작품들과 닮았다.
절대 진리와 휴머니즘을 좇는 구도자적 철학도 작품과 일치를 이룬다. 그에게 예술은 삶 그 자체이며 종교이자, 삶과 종교가 또 예술임이 분명하다.
- 조각의 경우 줄기차게 얼굴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얼굴’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나?
70년대 전반부터 얼굴을 소재로 작업해왔다. 어떤 작업을 해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을 계속 하게
되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나 싶다. 얼굴은 인간의 포인트다. 인간을 얼굴로 표현한 것이다.
- 최근들어 조각들의 표정이 밝아진 느낌이다.
그렇다. 70, 80년대 얼굴 조각들은 슬픈 표정이나 독한 표정이 많았다. 소설가 게오르그가 ‘세상이 병들었을 때 시인의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는데, 그때는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암울했던 모양이다. 90년대 들어 환갑을 맞았고 마음의 안정도 찾았다. 60을 이순이라고 하지
않나.
이순은 들려오는 소리를 따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하늘에서 시키는 바를 따른다는 뜻 아니겠는가. 욕심 내지 않고 무엇을 애써 하고자
하지도 않고 거짓 없이 하늘의 소리를 좇으니 마음의 고민이 해소되었다. 그러자 형태도 편안해진 것 같다.
- 정면은 선처럼 얇으면서 측면은 양감이 느껴지는 형태적 특성이 일관되게 보인다. 특별한 의미가
있나?
그것 역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사를 더듬어 볼 때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유에 변화를 주어 또 하나의 유를 창조할 뿐이다.
이집트 미술의 측면성이라던가 운주사 와불의 납작한 형태, 모딜리아니 조각의 평면성 등을 내 작품도 무의식적으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조각의 형태가 물고기를 연상시킨다고 하기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물고기는 물의 압력으로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내 조각의 인물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압력과 긴장 속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직립이란 형태 또한 세상과 대결하며 참선하는 인물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작품 활동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는 것이 있나.
느낌이 크게 작용한다. 미술사를 연구하며 구상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한다. 음악가 카잘스가 행복의 비법에 대해 ‘마음에서
오는 소리를 따라가라’라고 말했다는데 옳은 말이다. 영감이란 없다. 그것이 영감일 수도 있겠다.
- 브론즈, 파스텔, 매직, 연필, 판화 등 다양한 매체적 실험을 하고 있다.
그 또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좇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판화 같은 경우에도 조각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흥미를 느껴 안으로 당길 때 힘을 주는 조선식으로 판각을 제대로
배웠다.
파스텔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재미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곁에서 함께 하다가 파스텔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국산 파스텔이 형편없어서 작업에 무리가 따랐다. 매직은 장욱진씨 집에 갔다가 하게 되었다. 당시 장욱진씨가
매직을 썼다.
매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독특해 보였다. 괜찮은 것 같아서 나도 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나 보던데 나는 자랑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계보를 잇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여러 가지 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은 즐겁다. 판화 같은 경우는 기법적 유희에 빠지는 것 같아 중단했다. 정신의 표현인 ‘기’가 아니라 ‘교’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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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김종영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이다. 하지만 선생은 수제자이면서도 추상이 아닌 구상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추상 조각은 시류였다. 하지만 나는 추상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그대로 좇다가는 스승의 그늘에 묻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승의 기를 고스란히 전수 받았다. 하지만 형태적 길은 달랐다.
어릴적에 ‘레미젤라블’을 읽고 큰 감회를 받았다. 그 후로 도덕적 휴머니즘 등 위고의 사상에 깊이 빠졌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종교적
성격이 강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