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베이징 합의’를 계기로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인 가운데 최근 제 20차 남북장관급회담을 하고 돌아온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발언 번복으로 ‘이면합의’ 논란이 정치권에서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대선 개입과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한나라당은 대선정국, 노무현 정권과 북한과의 ‘거래’로 의심하며 이번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여권이 판흔들기를 위한 ‘남북정상회담 분위기’를 적극 띄우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논란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를 내고 있다.
게다가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올해 8.15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내놔 벌써부터 ‘북풍’의 세기가 강도를 더하고 있는 것.
이면합의 논란이 일종의 ‘북한 달래기’로 해석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이벤트성 남북정상회담 논의를 제안해 오거나 이른바 성사될 경우, 한나라당의 북풍 우려가 현실로 다가 올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달라는 대로 준다고 했을까?
일단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이 대북 지원의 규모와 시기에 대해 구두 합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 수준의 의견 접근을 이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나중에 번복했지만, 회담의 수석대표를 맡았던 이 통일부 장관이 “양측이 합의한 것이 비료 30만t, 식량 40만t”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은 그 정도의 의견조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북측보다 우리측 입장이 더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에 대해 북측 언론이 “소중한 합의를 이뤘다”고 보도한 점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물론 지금까지 이뤄진 장관급회담과 대북 쌀, 비료 지원의 과정 및 규모 등 전례에 비춰 봤을 때 이런 상황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남북은 그동안에도 쌀, 비료 지원에 대해 장관급회담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룬 뒤 경제협력추진위와 적십자회담에서 구체적인 사안을 결정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 북한과의 합의는 지난 5차 6자회담에서 도출한 북핵 해결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핵 폐기의 절차를 담은 ‘2.13 합의’의 원칙은 북한의 핵 폐기 과정에 따라 북한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장관의 말대로 합의가 있었다면, 북한은 미리 지원 약속부터 받아놓고 핵 폐기에 나서는 셈이다. 정부가 2.13합의의 성과로 자랑해온 ‘인센티브제’와는 성격 자체를 달리하고, 대북 지원을 6자회담 합의 이행에 결부시켰다는 정부 설명과도 배치된다.
일종의 ‘북한 달래기’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비료 지원에서도 정부는 북한의 입장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4일 “북측이 비료 30만t 지원을 거론하면서 봄 비료를 우선적으로 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아 현재로선 한꺼번에 지원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과거 봄, 가을로 나눠 보내던 것을 한꺼번에 보낼 경우 북한은 하반기에 추가로 비료를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 북풍 잠재우기 안간힘
한나라당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가서 쌀과 비료 70만톤을 주기로 했으면, 이에 상응하는 북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밀실야합의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내정간섭’ 중단을 공식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연일 한나라당을 겨냥해 비방 공세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핵폐기 등을 전제하지 않은 채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키로 한 것은 한나라당의 정권교체를 막기위한 ‘남북정권 합작’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장관이 북한에 가서 말로만 한나라당을 비방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한나라당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술수”라며 “이 장관이 귀국 후 북한은 한나라당을 비방했다. 뒤집어 보면 (남북정권이)합작해서 한나라당을 반대하고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아니냐”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이 장관이 쌀과 비료를 70만톤 주기로 했으면 이에 상응하는 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핵폐기와 인권문제 개선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물자지원을 약속했다면, 또 쌀과 비료 70만톤을 주고 정권교체를 막기 위한 남북정권이 합작하는 이런 형태가 된다면 민족사의 범죄”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남북문제에 집착하는 것만큼 남북문제가 민족의 평화와 통일차원에서 접근해야지 무너지는 권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남북문제를 이용하고 쌀과 비료를 갖다 주고 정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역사로부터 준엄한 비판과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한나라당은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쌀, 비료지원 배경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이날 현안브리핑에서 “이 장관이 쌀과 비료지원을 이면합의 했음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남북이 서로 짜고 대국민 사기극을 전개한 셈”이라며 “이면 합의에는 남북정상회담이 거론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나 대변인은 이어 “차기 정권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은 판을 근본적으로 뒤집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왔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면서 “남북이 서로 짜고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통일연구원 “8.15 남북정상회담 성사가능성”
이런 가운데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올해 8.15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내놔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통일연구원은 앞서 4일 ‘2.13 북핵 합의 이후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남북 모두 실리추구라는 인지 아래서 관계 발전을 위한 추동력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장관급 회담, 특사교환, 정상회담 수순이 조심스럽게 전망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올해 상반기 장관급 회담 등 당국 회담 활성화, 6.15 시점을 전후한 특사교환, 8.15 전후 정상회담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했다.
정상회담이 어려울 경우 남북 총리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인터넷매체와의 공동 인터뷰에서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통일연구원은 “대선 국면에도 불구, 참여정부 말기 한반도 긴장완화와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남북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갈 필요성에 따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북한이 안정적 대북지원을 위해 상징적 계기가 필요하다는 실리적 이유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긍정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통일연구원은 이어 북한이 남한 내 민족주의 정서를 확산시키고 대북지원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 상징적 민족공동행사를 제의, 6.15와 8.15 등을 계기로 남북한과 해외동포 등 3자 연대방식의 ‘이벤트’도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