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칼 빼든 DJ
김대중 대통령 민주당 총재직 사퇴,
향후 정국구도 일대 파란 예고
“저는 먼저 지난 10월
25일 행해진 3개 지구에서의 보궐선거에 대한 패배와 그 후 일어나고 있는 당내의 불안정한 사태에 대해서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또한
여러분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국민에게도 큰 심려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당 총재직을 사퇴하고자 결심했음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김대중 대통령의 당 총재 사퇴 선언문 중)
김대중 대통령이 최후의 칼을 빼들었다. 김 대통령은 지난 11월 8일 당무회의를 통해 당 총재직 사퇴의사를 밝혔다. DJ의 폭탄선언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등의 정치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앞으로의 정국운영 변화에 초미의 관심을 쏠리게 하고 있다. 특히 내년 대선을 앞두고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며 정치쇄신을 요구했던 민주당 최고위원들조차도 김 대통령의 사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국운영에 심혈 기울일 터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선언 전날인 7일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들과의 청와대 간담회를 통해 당내의 인적쇄신, 전당대회
시기를 비롯한 정치일정, 지도부 일괄사의 표명 등에 대한 김 대통령의 답변을 기대했던 최고위원들에게 김 대통령은 “내일 당무회의를 통해
최종적인 입장을 표명하겠다”는 입장을 전하며, 최고위원들의 사의를 받아들여 상임고문체계로의 전환을 밝혔다. 간담회를 마치고 나온 최고위원들은
‘대통령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며 뜻밖의 답변에 무척이나 당황하는 눈치였다.
결국 대통령은 최후의 선택을 강행했다. 임기를 1년 3개월이나 남겨둔 상황에서 당을 떠나는 유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쪽은 뭐니뭐니해도 민주당이다. 동교동계와 非동교동계, 구파와 쇄신파, 대선주자와 非대선주자 등 저마다의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당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구심점이 김 대통령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기 때문이다. 특정인사의 퇴진 등을 주장하며 당내
인적쇄신을 요구했던 쇄신파들도 이번 결정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를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당 내부의 문제보다 앞으로의 정국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분석된다. 특히 내년에는 대선을 비롯한
지자체장 선거, 월드컵, 아신안게임 등 굵직한 일정들이 예정돼 있다. 과거 대부분의 정권이 끝까지 의사결정권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임기
말에 이르러 극심한 레임덕 현상을 보이며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던 경험을 보더라도, 이번 김 대통령의 결정은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당에 자율성을 보장하고 대통령은 국정에만 힘쓴다면, 오히려 10.25 재보선의 참패로 드러난 민심의 이반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도 그동안 “당리당략을 벗어나 민생과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는 대통령이라면 언제든지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누누이 밝혀왔던 터라, 여권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야당의 대여공세도 한층 수그러들 전망이다.
민주당,
혼란 속의 각개전투(?)
그러나 대통령의 결단으로 민주당의 혼란이 가속화될 것이란 분석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총재직 사퇴 선언이 발표된 직후, 민주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태의 원인을 두고 각 분파간에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퇴진을 반대했던
박양수 의원은 당무회의장 주변에서 “대통령 총재직 사퇴에 쇄신파도 책임이 있다”며 “쇄신파도 의원직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해 구파와 쇄신파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음을 드러냈다.
분파의 각개전투는 대선 예비주자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각 대선주자들은 김 대통령의 결정에 당혹스러워 하기는 했으나, 이번 결정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며 차기 대권구도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인제 고문은 본지 172호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당분간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면서 추이를 관망하겠으며, 반 이인제 모임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총재 사퇴 파문으로 그동안 우군이었던 권노갑 전 최고의원의 입지가 줄어든 상태라 적잖은 난항이 예상되기도 한다. 한화갑
고문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철회를 건의하며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 내년 1월에 치루어질 전당대회에서 당총재와
대권후보에 도전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은 반 이인제 대열에 합류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쇄신파의 대표주자인 김근태, 정동영 고문도 “워낙
급작스러운 일이라 앞으로 사태를 지켜보겠다(김)”, “할말이 없다(정)” 등 사퇴선언 직후 극도로 말을 아꼈다. 노무현 고문과 김중권 고문도
“앞으로 당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단합해야 한다”는 식의 원론적인 입장만을 표명했다. 그러나 내년 1월로 예정된 전당대회 일정과 총재 및
대선주자 결정이라는 현안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입장차가 커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며, 이러한 혼란이 당내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발전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차기 내각 구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대해서는 정기국회가 끝나는 연말이나 내년초에 전면적인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9일 “김 대통령은 남은 임기동안 경제회복 등 국가적 과제수행에 매진하기 위해 여당 총재직을
사퇴한 것으로 안다”면서 “내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기국회가 끝나고 나면 개각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개각은
DJP 공조붕괴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의 의사가 적극 반영될 것으로 보이며, 정치적인 색깔을 최대한 배제한 중립내각의 형태로 구성되리란 전망이다.
야권, 어디로?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권에게도 적잖은 파장을 안겨줬다.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결단을 반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앞으로의
정국 구도에 고심하는 눈치다. 외견상으로는 민주당의 혼란과 분열을 틈타 정국 주도권을 확고히 점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게 되었지만, 대통령이
민생안정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초당적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터라, 앞으로의 대여 공세에 방향타를 잃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반 DJ’의 효과를 노리고 진행되었던 차기 대권전략 구도에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더구나 최근
이부영 부총재와 김덕룡 의원의 ‘신당 출현’성 발언은 한나라당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자민련과의 관계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지난 9일 대전일보 창간 51주년 기념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이 만나자고
할 땐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며 DJP 회동의 가능성을 밝혔다. 이는 교섭단체 구성에 비협조적인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에 대한 정치적
압박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JP로선 총재직 사퇴로 새국면을 맞은 김 대통령과의 연계가, 최근 좁아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울 수
있는 호재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해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자민련 일각에서도 DJP 회동이 실제 성사될 경우 ‘신 3김연대’도 가능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1년여라는 적잖은 시기를 남겨두고 당 총재직 사퇴라는 초강수를 선택한 DJ 정권의 의도대로, 앞으로의 정국운영이 원만히 진행될지 지켜봐야
할 때다.
장진원 기자 newsboy@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