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개표가 종료된 지난 12월20일 아침, 97년에 이어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대선 패배에 따른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동지 여러분에게 또 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한 이 못난 사람은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한나라당사에 마련된 기자회견 장은 눈물 바다를 이뤘고, 일부 의원들은 그의 정계은퇴를 반대했다. 그 후로 1년이 지난 지금 이회창 전 총재는 불법 대선자금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눈물의 기자회견을 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앞서 지난 10월30일 대선자금 수사 초기 대국민 사과를 한 바 있으나 지금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조사 결과 이 전 총재의 측근인 최돈웅 의원과 서정우 변호사가 엄청난 규모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내역이 속속 드러나자 이회창 책임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당 일각에선 “이 전 후보가 기자회견 형식을 빌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게 될 것이며, 문제는 시기일 뿐”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1000억’ 혹은 ‘2000억’
현재까지 검찰수사 결과 한나라당은 삼성, LG, SK 등 재계 유수의 기업들로부터 100억~152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거둬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돈만이 400억을 넘고 있고, 현대차와 롯데를 포함한 5대 그룹, 나아가 최돈웅 당시 재정위원장이 후원을 강권했다는 100여 기업을 다 추적하면 불법 대선자금의 규모는 1,000억 원대 안팎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한편, 열린우리당 이해찬 의원은 12월11일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약 2천억원 정도를 쓴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당 ‘깨끗한정치 실천위원회(위원장 배기선)’ 회의에서 “이제 (한나라당) 전체 불법대선자금이 반쯤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대기업 일부만 밝혀진 것이고 일부 대기업, 중견기업은 아직 손도 안댔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의원은 “지구당에 6백억~7백억원 정도, 사조직에서 5백억원 정도, 당 공식기구에서 5백억원 정도 쓴 것으로 보인다”며 “지구당에는 공식적으로 2백억원정도, 비공식적으로 각 지구당에 1억5천만원씩 약 4백억원 정도 내려갔다”고 주장했다.
“昌, 지옥 같은 생활”
현재 이회창 전 총재는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대선자금 수사를 지켜보며 대응책 마련을 위한 장고에 들어갔다. 12월10일 아침, 홍사덕 총무가 그를 찾았으나 10여분 만에 나왔다. 홍 총무는 “이 전 총재는 내 말만 잠자코 들었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으며 얼굴이 많이 상했다”고 전했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총재가 신경과민으로 연일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엔 ‘바람이라도 좀 쐬시라’는 권유에 따라 외출 채비를 했으나 집 밖에 진을 친 기자들을 보곤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한나라당 주진우 의원은 “지난 8일 총선 불출마 뜻을 전하려고 전화했더니 이 전총재의 목소리가 침울했고, 눈물까지 묻어나더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의 핵심 측근인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 소장도 “이 전총재가 최돈웅 의원 사건 이후로 두 달간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대국민 사과를 하고 검찰에 자진출두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이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강력 대응하지 않은 채 최병렬 대표측이 이 전 총재측에만 대선자금 고해성사를 압박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승민 전 소장은 이날 “이 전 총재는 당이나 여론의 (대국민 사과) 요구가 있고, 또 공식 입장표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며 결자해지 차원에서 방법을 고심중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 때리기 숨은 의도 있나
유승민 전 소장은 옥인동을 방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현 상황은 대선자금 대 대선자금의 문제로 풀어가야 하는데,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대 측근비리로 몰고 가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대통령이 수차례 자기 입으로 부정한 돈을 썼다고 했고, 자기 입으로 수십억 얼마하고 실토했는데도 그걸 물고 늘어지지 않고 왜 이렇게 끌고 오는 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그는 “일 터지면 자기들 살 구멍부터 찾는 게 한나라당의 현실”이라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했다.
이 전 총재측은 최 대표가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이회창당 탈색의 계기로 이용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던지고 있다.
특히 이 전 총재측은 당내에서 “이젠 이 전 총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며 압박을 가해 오고 있는 데 대해서도 불쾌해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에 대해선 수사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데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기는 커녕 오히려 ‘이 전 총재 때리기’를 거드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서정우 변호사에 대한 검찰 수사를 한나라당이 사전에 인지했고, 서 변호사가 당과 협의를 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고 있다.
한나라당, 당내 지도부간 갈등 양상
서청원 전대표 등 당내 구주류의 불만도 높다. 때문에 정가에서는 구주류와 신주류간 갈등과 대립 양상이 분당사태로까지 치닫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서청원 전 대표는 12월9일 의원총회에서 “썬앤문 사건이 4월에 불거졌는데 이제 와 95억에 대해서는 수사 안하고 2억으로 우리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며 검찰수사를 비판한 뒤, 불공정한 검찰 수사에 미숙하게 대응하고 있는 당 지도부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서 의원은 “정치개혁이란 이름에 의해 우리는 매번 끌려갔고, 결국은 이렇게 됐다”며 “이런 것은 야당이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해, 당 지도부에 대여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말 것을 주문했다.
서 의원은 “당이 이 시점에서 단합해서 가야 하는데, 50% 물갈이나 누구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불과 몇 명이 이 당을 재단하려 하고 사당화하려고 하면 안된다”고 노골적으로 최병렬 대표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당을 ‘새로운 비상체제’로 꾸려가야 한다”며 사실상 당 해체후 재창당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최 대표는 “도대체 누가 당 해체를 얘기하느냐. 재창당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당해체론자는 반당분자인만큼 그런 사람을 공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강력히 맞받아, 앞으로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둘러싸고 한나라당이 심각한 내홍에 휩싸일 것임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