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와 패러디로 원작 비틀기
아끼 까우리스메끼의 ‘죄와벌’과 ‘록키6’
‘죄와벌’은 핀란드 감독 아끼 까우리스메끼의 데뷔작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성냥공장 소녀’로 국내 관객에게 알려진
아끼 감독은 이 작품을 도스또예프스키의 고전에 대한 오마주로 만들었다. 고전의 주제의식을 오롯이 드러내면서도 아끼식 해석이 충분히 가미된
것이 매력이다.
아끼는 19세기 러시아 빼째르부르그를 20세기 후반 헬싱키로 옮겨 놓는다. 가난하게 홀로 살아가는 법학도 출신의 라이카이넨(마르꾸 또이까)은
한 남자를 찾아가 너무도 간단히 총으로 쏴 죽인다. 살해당한 남자는 라이카이넨의 약혼녀를 뺑소니로 죽이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중년의 사업가이다.
출장요리를 나왔다가 살인 현장을 목격한 에바(아이노 세뽀)의 신고로 수사는 시작되지만, 라이카이넨에게 연민을 느낀 에바는 목격을 부인한다.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주인공. 에바를 흠모하는 남자는 라이카이넨을 감시하고, 에바는 라이카이넨에게 자수를 권유한다.
기교
자제하고 세계관 표현에 충실
영화는 날카로운 칼날에 두동강 나는 벌레를 클로우즈업하면서 시작된다. 도축장에서 고기를 도려내는 인부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피와 고깃덩어리의
잔해로 범벅이 된 하수구는 강렬한 이미지지만 담담하게 그려진다.
설명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살해 장면도 파격적이다. 하지만, 시각을 자극하는 장면은 이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아끼는 영상적 기교를 최대한
자제하고 신과 인간, 선과 악, 죄와 인간본성 등 원작의 관념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다. 동시에 아끼는 특유의 건조하고 과장없는 시선으로
현대적 해석과 독특한 세계관을 담아낸다.
복수 모티브의 도입은 살인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동기 부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증거불충분’이라는 명목으로 법에게 배신을 당했던
주인공은 자신이 또한 ‘증거불충분’으로 빠져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벌레 같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조롱하고
단죄하기 위해 살인을 선택했지만, 스스로 벌레와 다를바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결정적으로 원작의 강렬한 구원 모티브를 제거함으로써 종교적 비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신적 구원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아끼의 세계관은 냉정하지만, 현대인에게 상당한 공감을 끌어낸다.
미국식 영웅주의에 대한 조롱
이번 ‘죄와벌’의 국내 상영에는 아끼의 6분짜리 단편 ‘록키6’가 함께 소개된다. 록키는 냉전시절 신화적 존재였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던 록키. 아끼 영화는 미국의 영웅 록키를 한껏 비웃는다.
가날픈 몸매의 록키가 소련 선수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다. 록키의 졸린 듯한 눈이나 덩치만 컸지 순진한 소련선수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다.
‘이식된’ 망상을 비웃으며 깨뜨리는 아끼 특유의 풍자와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