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에게 아리랑은 무엇인가?
아리랑의 의미와 성격
한민족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아리랑이 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
“아리랑은 조선 어디서나 들을수 있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 1986년 H.B. 헐버트 선교사는 잡지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를 통해 아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또한, 직지사 방장 관응큰스님은 “아리랑은 배달의
진언(眞言)”이라 했고, 시인 고은은 “한국인의 만다라”라고 말했다.
한민족에게 아리랑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수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아도 한민족은 누구나 아리랑을 부른다. 월드컵 같은 국제 경기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는 응원가로, 타국에서는 향수의 노래로, 통일의 그날에 손을 맞잡고 부를 노래도 아리랑이다.
민중의 정서를 담는 그릇
한민족아리랑연합회에서 펴낸 ‘아리랑 판타지’에 의하면, 아리랑은 조상들이 처음 이 땅에 터를 잡고 살던 시절, 산에 대한 외경심으로 바쳐진
신가였다. 이것이 노래가 되어 전승되면서 노동요가 되기도 했고, 유희요가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의식요, 정치요가 되어 현재 50여종 3000여수가
넘는 아리랑을 만든 것이다.
아리랑은 구조적인 특성상 개인의 심사를 노랫말로 지어 붙이기 쉬웠다. 민중의 정한이 아리랑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흔히
아리랑이라고 하면 한의 노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리랑에는 서민의 애환과 원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슬프기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김연갑 아리랑협회 상임이사장은 한민족에게 한의 개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중국이나 일본같이 원한이나 극복의
개념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슬픔을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자양분으로 소화시켰다.”고 말한다. 시집살이의 설움이나 성적인 불만도 아리랑에서는
풍자나 해학으로 나타난다. 한민족은 아리랑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고 승화시킨 것이다.
시대의 바로미터
아리랑은 민중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었던 만큼, 시대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대원군 정권기에는 세도정치를 비아냥거려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8촌이 되려므나”는 노랫말이 유행했는가 하면, 구한말에는 조정의 외세를 경고해 “아라사 아차하니 영국은 영글렀네. 미국놈 믿지말라
일본이 일등이다”는 이른바 ‘아미일영가’가 널리 불리기도 했다. 또한,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할때
민중들은 “백성을 버리고 가시는 님군은 발병이 난다”고 노래했다. 심지어 천연두 예방주사를 알리기 위한 ‘종두아리랑’,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을 위한 ‘한글아리랑’ 같은 계도적 아리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제시대 총독부도 집권에 이용하기 위해 아리랑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했다. 결과적으로 총독부는 대동아전쟁에 총력을 다하라는 내용의 ‘비상아리랑’을 보급했다. 비록 부정적 용도로 아리랑이 이용되었지만, 아리랑의
파급력을 일본도 간파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이처럼 민중의 역사였고, 민중의 ‘지하방송’이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리랑은 민중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정선아리랑 중에는 조선창업과
이성계정권에 대한 반발을 읽을 수 있는 노래도 있다. 동학군들의 아리랑이나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시 백성들이 불렀던 아리랑, 한말 의병들의
아리랑도 모두 저항 정신을 담은 것이다.
“싸우다 아니되면 불지르자”
일제치하가 시작되면서 아리랑의 저항성은 정점에 이른다.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는 “싸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 천지에
불지르자”는 저항의 아리랑을 노래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경기아리랑은 본조아리랑으로 불리며 아리랑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최근들어 나운규의 아리랑은 일본음악의 논리에 맞춰진 것으로, 전통가락을
훼손시켰다는 문제제기가 있지만, 이 노래가 민중의 가슴에 저항의 불씨를 당긴것만은 사실이다.
김 이사장에 의하면, “날좀보소 날좀보소”의 밀양아리랑도 흥에 겨워 불리워졌던 노래만은 아니다.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의 총격 앞에서
1만4천여명의 백성이 얼싸안고 외쳤던 노래가 밀양아리랑이었다는 것이다. 광복군 아리랑이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항일가사를 거꾸로 불렀던
정선의 ‘거꾸로아리랑’ 등 일제강점기에 아리랑은 저항의 노래로 꽃피었다. 재미있는 것은 60-70년대 일본 형무소에서 가장 많이 불러진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저항의 노래’라는 책에 명시된 내용이다. 김 이사장은 “저항의 뜻을 알고 그들이 부른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 수감되었던 독립투사들이 아리랑을 불렀고, 그것을 일본인들이 답습했다고 볼수있다.”고 말했다. 일본인에게도 억압받는
자의 노래로 각인될 만큼, 아리랑은 뜨겁고 절절한 노래인 것이다.
“놀라운 대동성을 지닌 노래”
아리랑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확인하는 노래이다. 정체성의 확인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결속력을 강화시킨다. 해외 교민들은 조국을
원망하고, 그리워하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그들은 아리랑을 통해 민족혼을 채찍질하고, 세계에 민족의 존재를 알렸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아리랑이 애국가 대신으로 불렸던 것도 아리랑이 민족의 상징이자, 연대성을 지닌 노래이기 때문이다. 김 이사장은 “눈물과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을 공유할수 있는 놀라운 대동성을 지닌 노래가 아리랑이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교민회장에 의하면, 북한주민들이 뉴질랜드 교민을 상대로 북한 상품을 파는데, 이때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아리랑은 연대성을 강조하는
메시지 그 자체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의 축하 공연과 두 차례의 만찬에서 아리랑이 등장했다. TV에 방영된 북한의
아리랑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2000년 9월 개최된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남북한선수가 아리랑과 함께 입장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인데 북한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남북 사이에 아리랑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며, 아리랑이 남북을 정서적으로 묶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아리랑을 매개로 북한과의 벽을 깨려는 시도가 다각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곡조와 발음, 개작의 용이함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민족에게 애환의 노래이자 고난의 노래인 아리랑은 세계인에게도 수용되는 보편적 매력을
갖고 있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을 완벽한 노래라고 표현했다. 어떤 노래가 전승되려면 구조와 기능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아리랑은 그런면에서 최상이다.
구조상 익히기 쉽고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키기 용이한 형식이다. 또한, 받침이 없고 ‘ㅇ’ 발음이 많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정서를 수용하고 노동력을 원활하게 하며 감정을 해소하는 등 기능도 다양하다.
스위스 세계선가에는 아리랑이 룰러바이(자장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해일이 밀려와도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 수 있을만큼 포근한
노래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이라는 3음보가 태생적으로 안정감을 준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수 없는 매력을 지닌 노래다. 분명한 것은, 아리랑은 대단한 ‘힘’을 지닌 노래라는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질긴 생명력의 노래이자,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노래, 한민족을 상징하면서도 한반도를 훌쩍 넘은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영화, 연극, 무용, 창극, 문학, 미술 등으로 장르를 확산하며 이시대에도 거듭나고 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