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성과 지성의 공존
사회의 편견을 고발한 뮤지컬 <캬바레>
“방안에 틀어박혀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지 말고/ 음악이 있는 이곳으로 찾아오세요/ 인생은 캬바레 같은 것/ 캬바레로
찾아오세요(Come to the Cabaret)…”
<캬바레>가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샘 맨더스 버전의 이번 공연은 1984년 한국 초연 때보다 더 관능적이며 사회비판적
면이 더욱 강해졌다.
춤과
노래 속에 살아있는 메세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공간 캬바레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캬바레>는 공연 전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거기에다 ‘에로티시즘’과
‘섹슈얼리즘’까지 내세웠으니 뮤지컬의 화려함은 안봐도 짐작가능하다.
감각적인 연출은 첫장면부터 드러났다. 진한 화장을 한 속옷차림의 쇼걸들이 의자에서 펼치는 관능적인 춤은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하게 한다.
뮤지컬보다 국내에서 먼저 알려진 노래 ‘캬바레’, ‘인생은 나의 것’ 등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또한
반주담당을 넘어 캬바레에 생생함을 불어넣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화려한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캬바레>의 쇼는 다른 뮤지컬에 비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캬바레>가
기존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차별되는 점은 춤과 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갈등에서 드러난 비판적 메세지가 핵심이다.
<캬바레>는 1930년대 나치독일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인 소설가 클리프와 ‘킷 캇 클럽’의 여왕 샐리, 하숙집
여주인 슈나이더와 과일가게 슐츠의 사랑이야기는 개인이 국가의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중반에 들어서면서 화려한
춤과 노래보다 스토리에 이끌리는 것은 <캬바레>가 메세지를 전하는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나약한 인물군상을 표현하는 매력적인 연기
<캬바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들 뿐이다. 킷 캇 클럽의 쇼걸들과 웨이터, 웨이트리스들만이
국가의 권력에서 벗어난 자유인처럼 보여진다.
사회자는 킷 캇 클럽의 진행자이자 사건의 변화와 등장인물들의 심정을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존재.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마이크를 갖다놓는
단순한 진행부터 엉덩이를 까며 사회를 조롱하는 비판자의 역할까지 도맡아 한다. 사회자를 맡은 배우 주원성의 익살스러운 연기도 인상적이다.
‘킷 캇 클럽’의 샐리는 뮤지컬의 여왕 최정원이 맡았다. 쇼걸의 뇌쇄적인 춤과 노래를 보여주며 시대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최정원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샐리는 자신의 일상까지 침입한 사회문제에 대면하기 보다는 익숙한 삶의 안주를 위해 클리프와의 사랑도 버린다.
샐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하숙집 여주인 슈나이더. 그녀는 슐츠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자신의 삶이 흔들릴까봐 사랑을 포기한다. 파혼당한
과일과게 유태인 슐츠는 나치독일의 희생양이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과 함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긴다. 사회 속의 힘없는 존재를 연기하는
이인철(슐츠)과 이경미(슈나이더)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다이아몬드보다 과일에 감동하는 슐츠와 슈나이더의 ‘빠인애플’노래는
배꼽을 잡을 정도로 웃기다. 이들의 노을빛 사랑이 뮤지컬의 재미를 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클리프는 이번 뮤지컬에서 잘 부각되지 못한다. 이방인이자 무기력한 지식인인 클리프는 상황을 피하기만
하는 나약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러나 클리프 역을 맡은 정동환의 가창력은 <캬바레>의 메세지를 전하기에 부족함이 있었고 많은
나이는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웃음을 통해 ‘편견’을 질타
<캬바레>는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듯 뮤지컬에 빠져든 관객들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는다. 돌을 던지는 주임무는 사회자가 맡았다.
그에게서 심각한 구석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회자가 여자분장을 한 고릴라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고릴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 “사람들이 날 비웃어도/
내 눈에 그녀는 아름다워요/ 뭐 어때요 /유태인이면..” 슐츠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는 슈나이더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나 우리를
향해 유태인이 죄가 될 수 있냐고 물어온다. 그는 양쪽에 여자와 남자를 끼고 춤을 추며 쇼를 선보이기도 한다. 세 명이 엉겨붙어 추는 춤은
어느덧 침대 속의 섹스로 변해 있다. 남자와 여자의 가운데에 있는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남녀의 구분으로 갈 곳을 잃은 동성애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회자는 야한 속옷차림의 쇼걸,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내보이는 파격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모습과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사회자의 모습에 관객들은 웃고 있지만 어느 순간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순간은 뮤지컬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뇌리를 스칠 때이다.
유태인, 동성애, 쇼걸에 대한 편견 등 <캬바레>는 사회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캬바레>의 압권은 마지막 정경이다. 대형 나치깃발이 내려오고 동성애자 바비와 유태인 슐츠가 독가스실로 사라지는 모습에 이성을
되찾는다. 사회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편견이 그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는 따가운 메세지를 함축하고 있다.
1930년대 나치독일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도 세계 한복판에서는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캬바레>가 현재까지 무대에 올려지는 것도 우리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편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편견을 버리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외치는 <캬바레>는 인식하지 못했던 관념의 틀에 경종을 울리는 기회로 다가온다.
문의: 02) 580-1135
“얼굴은 화끈해도 뒷골은 서늘한 무대를 만들겠다”
1985년 |
이혜선 기자 hyesu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