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체성 지키기인가, 밥그릇 싸움인가
스크린쿼터제, 폐지론 vs 유지론 공방 치열
또다시 스크린쿼터제(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가 문화계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영화계가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50% 육박이라는 낭보에 들떠있는
사이, 재경부가 스크린쿼터제도 축소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스크린쿼터 문화연대를 비롯한 영화계는 경제부처와 면담을 갖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본격 대응에 들어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영화인들의 표정은 99년 임권택 감독이 삭발을 감행하던 분위기 그대로 비장했지만,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형태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재경부의 입장이 전례없이 강경할 뿐아니라, 영화계 내에서도 목소리가 분열되고 있다. 정부 또한 부처별 대립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여론이 과거와는 다르다. 스크린쿼터제 옹호쪽으로 적극 기울어졌던 99년에 비해, 밥그릇
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것이다. 그동안 국민감정에 호소하던 스크린쿼터제 유지론이 보다 치밀한 논리와 설득을 갖추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문화냐 산업이냐
스크린쿼터제 쟁점의 초점은 ‘영화를 문화로 볼 것이냐 산업으로 볼 것이냐’이다. 스크린쿼터제 폐지론자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산업으로 본다면
폐지가 당연하기 때문이다. 몇몇 전문가들은 스크린쿼터제가 “관객 선택의 폭을 제한하고 시장을 왜곡시킨다”고 지적한다.
재경부와 외교통상부는 오는 3월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에 때맞춰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스크린쿼터제의 단계적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 넘을 때까지 현행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하라는 영화계의 요구는 지난해 국산영화시장 점유율이
50%에 육박함으로써 어느 정도 충족됐다”는 것이 재경부의 견해다.
극장업계 또한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외치고 있다. 여기에는 부율(극장주와 제작사가 수익을 나누어 갖는 비율) 갈등이 발단이 되었다. 현재
극장과 배급사는 외국영화의 경우 입장료를 4대 6으로, 한국 영화는 5대 5로 배분하고 있다. 최근 영화제작사협회와 영화인회의가 한국 영화의
입장료 수입을 외국영화와 같은 비율로 조정할 것을 요구했고, 극장주측은 이에 반발해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들고나선 것이다.
영화 제작, 배급업계는 스크린쿼터제가 문화주권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의 양기환 사무처장은 “한국
영화가 이만큼 자리잡은 것은 스크린쿼터제도 덕분이며 외국에서도 한국의 성공사례를 연구하고 있다”면서 “스크린쿼터제를 포기하면 한국 영화는
또다시 추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영화 점유율 상승을 스크린쿼터 폐지 논리로 거론한 재경부의 발언에 대해서도,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는 장기간에 걸친 평균지표로서 산출됐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반박했다. 헐리우드가 세계 시장의 85%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영화계가 공정한 경쟁을 하려면 최소한의 보호 조치가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도 같은 입장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영화관련 주무부서도 아닌 재경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도하는 것은 영화산업의 문화적 측면을
도외시한 발상이다”며 불쾌함을 표했다.
“우린
외제차 탈테니 너넨 국산영화만 봐라”
여론은 과거보다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재 각종 인터넷 사이트 토론게시판은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뜨겁다.
스크린쿼터를 지키려는 네티즌들의 모임인 ‘스크린쿼터 수호천사’(http://www.screenquota.org)를 비롯한 각종 게시판에는
정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스크린쿼터제를 옹호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라는 분야를 정치인들이 정치적 시각과 잣대로 판단해 노름판의 판돈모양으로 취급하는 것이
정말 맘에 들지 않습니다”(김유승)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세계에서 누가 헐리우드의 폭격에 맞설 수 있을까요?”(주재경) 등이 스크린쿼터제
유지론의 요지다.
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조시바’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우린 외제차를 탈테니 너넨 국산영화만 봐라”는 것이 영화인들의 태도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스크린쿼터제 철폐를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기자회견에 대해 “의식있는 영화인들이 몇이나 되겠냐?”고 꼬집는 네티즌도 다수
있었다. ‘원호성’이라는 네티즌은 영화인 기자회견에 대해 “최근 인기 스타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야 이것도 흥행이 된다는 싸구려 논리”라고
비판했다. 영화인들의 ‘자기 몫 챙기기’라는 인식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50%에 육박하게 됨으로써, 스크린쿼터제 자체가 모순에 빠진 것도 폐지론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동안 옹호론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였던 ‘문화의 다양성’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송명섭’이라고 자신을 밝힌 네티즌은 “쿼터를 내세우며 독점을 반대하던 나라가 쿼터로
독점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특히 작년에는 거대 자본에 의한 헐리우드형 한국영화가 다수였고, 조폭이라는 트랜드가 지배적이었다.
작품성을 갖춘 외국영화가 설자리가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 때문에 “스크린쿼터제가 과연 다양성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라는 회의론이
많아졌다.
“스크린쿼터제가 만병통치약 아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주장하면서 왜 한국은 제3세계 영화는 보지 않나?”라는 질문은 현재 스크린쿼터제 논리로는 대답하기 곤란하다. 스크린쿼터제가
국수주의에 불과하다는 의심도 이러한 문제를 영화인들이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정종성씨(33)는 “스크린쿼터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독립영화나 저예산영화 또는 제3세계국 영화를 대상으로도 스크린쿼터 같은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씨는 “스크린쿼터제에 언제까지 의존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부의 실질적 지원육성책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영화계와 정부 모두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영화의 상황도 변했고, 영화의 국경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추세다. 제작과 배우는 프랑스, 배경과 언어는 폴란드, 스텝은 미국인이라는
식의 다국적 영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보호해야 할 자국 영화’의 정의 자체도 모호하다.
이 시점에서 예전의 논리대로 스크린쿼터제를 주장하는 것은 많은 모순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즉 스크린쿼터제가 불필요하다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방식과 의미에 대해서 보다
깊은 고민과 논리적 보완이 필요한 시기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