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 대선을 4개월여 앞두고 ‘혹시나’ 했던 초대형 변수가 결국 현실로 등장했다.
남북 당국이 8일 분단 이후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8월 말 평양에서 만나기로 합의하면서 ‘북풍(北風)’ 이 대선정국에 몰아치는 양상이다. 남북은 아직 구체적 의제설정에 합의치 않았지만 그동안 북한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투쟁을 세차게 전개해야 한다”고 하는 등 노골적인 대선개입 의지를 드러낸 상황에서 이뤄지는 정상회담이어서 부적절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것. 남북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 범여권은 일제히 “한반도 평화의 중대한 전기”라며 환영의 뜻을 표명하면서‘초당적 협조’를 촉구하고 나선 반면, 한나라당은 “대선판을 흔들어 정권교체를 막아보겠다는 기획성 정상회담”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날카로운 대립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8개월여 동안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두 주자의 각축장처럼 비쳐졌던 대선 판도가 정상회담 돌출변수로 어떤 상황을 맞게 될 지 주목된다.
7월 우리측 제안 북에서 받아들여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지난달 우리측이 먼저 제안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8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사실 국민보고 청와대 국가정보원, 통일부 공동회견’을 통해 김만복 국정원장은 “지난달 우리측은 남북관계 진전 및 현안상항 협의를 위해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우리측 제안에 북측은 지난달 29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명의로 ‘8월 2~3일간 김 국정원장이 비공개로 방북해 줄 것’을 공식요청했고, 이에 따라 김 원장은 노무현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비공개 방북하게 됐다.
김 원장에 따르면 1차방북(8월2~3일) 당시 김 통전부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임에 따른 중대제안 형식으로 “8월 하순 평양에서 수뇌상봉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아울러 정상회담 개최 제의 배경에 대해 “김 위원장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노 대통령을 만날 것을 결심했으나 그동안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했다”면서 최근 남북관계 및 주변정세가 호전되고 있어 현 시기가 “수뇌상봉의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말했다고 전했다는 것.
김 통전부장은 김 원장에게 가급적 빠른 시일내 국정원장이 재방북, 남측의 동의 여부를 공식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김 원장은 지난 3일 서울로 돌아온 뒤 노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 북측 제의 수용을 지시받았다.
김 원장은 지난 4일~5일 2차 방북에서 북측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한다’는 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김 통전부장은 이를 김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에 따라 남북 양측은 이달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합의서를 김 원장과 김 통전부장 명의로 나누게 됐다.
김 원장은 그러나 지난 2000년 1차 정상회담 당시 김 국방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약속해 놓고 2차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게 된 이유에 대해 “우리측은 정상회담의 문은 열려있다. 장소와 시기문제는 언제고 어디에서고 좋다라는 입장을 밝혀왔고, 북측이 노 대통령을 잘 모시기 위해서는 평양이 가장 의미있는 장소가 되겠다고 제의해와서 평양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 의제도 없이 급조?
북핵문제가 해결국면에 접어든 현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합의된 남북정상회담 개최배경에 대해 의구심이 일고 있다.
범여권에서는 그동안 남북정상회담 군불때기를 지속해왔고 노 대통령도 잇따른 기자회견과 발언을 통해 근본적으로 정상회담에는 반대하지 않고 있음을 밝혀왔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남북정상회담 개최설’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추진여부를 부인해왔던 것.
청와대는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7일자 중앙일보의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 개최 보도와 관련,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결국 4자 정상회담이 아닌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형식만 달랐을뿐, 극적인 한반도 빅뱅 흐름은 감지된 셈이다.
사실상 노 대통령의 대북특사 역할을 담당했던 이해찬 전 총리는 방북 후 빠르면 ‘6월 정상회담’, 늦어도 ‘8월 정상회담’이 열릴 것임을 강력 시사했었고 안희정씨의 비선대북접촉 논란 등도 있어왔다.
정상회담 군불때기 보다 더욱 우려됐던 것은 북한의 남한 선거개입시도 노골화.
북한은 그동안 각종 관영 매체를 동원해 일방적으로 한나라당을 겨냥해왔고,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은 지난 6월 “한나라당의 반(反)공화국 대결의식, 전쟁의식은 갈수록 악랄해지고 있다”며 “남조선 인민은 한나라당에 대한 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같은 달 노동신문 사설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투쟁을 세차게 전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같은 날 평양에서 열린 6.15 공동성명 7주년 행사는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주석단 입장을 둘러싸고 파행을 겪기도 했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지난해 초 북한은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반보수 대연합을 구축해 보수세력의 결탁과 도전을 분쇄하자”고 바람을 잡았다. 선거가 임박하자 민노당을 찍으면 사표가 되니 열린우리당을 찍으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했다.
올 들어서는 “이명박이 권력을 잡으면 전쟁의 불구름이 밀려올 것”이라는 등 특정 후보를 겨냥한 ‘낙선 운동’의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논란 속에 남북이 만나는데는 합의했으나 결국 대선을 앞두고 어떤 의제를 설정할 지가 난제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이 군사적 한계를 넘어 종전선언 등 한반도 냉전체제를 걷어내는 데 합의한다면 이른바 북풍은 메가톤급 파워로 부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벤트성 만남에 그친다면 역풍이 불어닥칠 가능성이 높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공동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의제는 북측과 준비접촉을 통해 충분히 조율해 나갈 것”이라며 “현 시점에서 구체적 의제를 어떻게 다뤄 나갈 것인지 현재 설명할 수 없지만 구체화되는데로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은 이날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서“시기와 장소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핵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을 개방할 수 있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며 “치졸하게 이번 대선에 정치적으로 이용할 꾀를 쓰면 안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가장 위협하는 북핵 문제를 반드시 매듭짓는 회담이 돼야 한다”며 “모든 의제와 절차 등을 국민앞에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임기말 대통령이 대선을 앞둔 시기에 평양에서 밀행적 절차를 통해 추진하는데 심히 우려를 표시한다”며“시기. 장소. 절차가 부적절한 남북정상회담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당은 강성 목소리, 후보는 온건 이미지라는 ‘투 트랙’으로 정상회담 변수에 대처하겠다는 속내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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