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박근혜 경선패배를 인정합니다" 아름다운 경선이었다. 그리고 패자의 모습은 더욱 빛났다. 정치인들에게 있어 가장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은 패배를 인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박빙의 승부였더라도 선거 결과에 대해 진 후보가 깨끗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상대 후보를 축하해 주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상 유례없이 격렬했던 한나라당 경선전에서 라이벌인 이명박 후보에게 선거인단의 득표에서 이기고도 다소 불확실하다는 여론조사로 석패한 박근혜 전 대표는 고통스럽고 억울할 법도 한 패배의 감정을 우아한 승복으로 승화했다.
"저 박근혜 경선패배를 인정합니다. 경선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대선후보로 선출되신 이명박 후보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국민과 당원의 10년 염원을 부디 명심해 정권교체에 반드시 성공해주시길 바랍니다"
20일 전당대회 때의 그의 '패자 연설'은 그 어떤 이의 제기나 변명 등 군더더기 하나없이 평소 그의 모습답게 의연하고 명징한 정신을 드러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동안 저를 지지해주셨던 국민 동지여러분. 저는 정치를 하면서 늘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다"며 "이번에도 여러분은 저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셨다. 정말 감사한다. 여러분 사랑 평생 잊지 않겠다"고 지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박 후보는 "치열했던 경선은 이제 끝났다"며 "아무 조건도 없이 요구도 없이 그동안 저를 도와주셨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이제 당의 정권창출을 위해 힘을 합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이제 잊어버리자"며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몇날몇일 거쳐서라도 잊자. 그리고 다시 열정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저와 함께 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그 열정을 정권교체를 위해 쏟아주길 바란다"고 지지자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과연 '절제와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지도자'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이날 언론과 한나라당은 당선된 이명박 후보 못지않게 박 전 대표의 이같은 태도에 더 주목하고 더 높이 평가했다. 경선이 이틀 지난 뒤에도 박 전 대표에 대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얼마나 진정으로 결과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진다. 겉으론 인정했지만 속으로 억울함과 고통을 삭이지 못한다면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패배의 아쉬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박 전 대표의 진정성은 측근들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박 전 대표는 21일 삼성동 자택에서 캠프 소속 의원 30여 명을 만나 자신의 뜻을 직접 전달했다.
그는 의원들이 경선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나누던 중 곽성문 심재엽 등 몇몇 남성 의원들이 눈물을 쏟자 "제가 많은 남자들을 울렸네요"라며 농담을 던지는 등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캠프 마지막 회의에 참석한 유정복 실장을 통해서는 "동지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죄송하다. 너무 고생한 관계자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우리 식구들이 불필요한 혼란이나 오해를 하지 않도록 자제해 달라"고 했다.
그는 전날 패배가 확정된 뒤 시내 모처에서 캠프 소속 의원 10여명과 30분간 차를 마시며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당의 정권교체에 다같이 힘을 모아 달라. 내 뜻이 이러한 만큼 주변 분들이 행여나 섭섭하더라도 따라 달라"고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도와 막판까지 분투했던 이들의 모습도 한결같았다. 덕장 밑에 악한 병사는 없었던 것.
"경선룰 협상의 최전선에서 여론조사가 투표에 끼어드는 것을 막지 못한 어리석음…"이라며 박 전 대표 측 김재원 공동대변인은 21일 경선 석패에 대한 자책어린 한탄을 토했다.
김 대변인은 이날 박 전 대표 측 대변인 자격으로 마지막 보도자료를 내고 이같이 밝히며 경선 석패의 원인인 여론조사 반영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박 전 대표가 직접투표에서는 이겼음에도 여론조사에 진 현실, 특히 1.5%포인트라는 '종잇장 차이'로 졌다는 결과는 그간 캠프를 대표해 경선룰 협상장에서 직접 '전투'를 벌였던 그로서는 억울함에 더해 책임감마저 크게 다가올 터. 그는 "대변인으로서의 역량부족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뒤진 것이 아닌지 탄식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어제밤부터 오늘 아침 먼동이 터올 때까지 저는 어두운 방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면서 "이제 저는 떠난다. 백척간두의 끝자락에 서서 서로를 향한 말의 성찬이 계곡을 메우고 산이 되는 험한 전장에서 벗어난다"고 밝혔다. 이어 "그간 언론인 여러분들의 과분한 격려와 애정으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박 후보를 돕는 대변인을 맡아 일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았다"며 "때로 마음을 삭이며 낯빛을 좋게 하려 노력했지만 힘든 경우도 있었고, 걸려온 전화를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지난날을 소회했다.
김 대변인은 "기사 한줄 고쳐보려고 몇 번씩 전화해서 괴롭혀드린 적도 있었다"며 "박 후보의 기사가 아니라 제 한사람의 언론보도였다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충심을 다했음을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이제 저는 박근혜 의원의 영원한 써포터스의 한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며 "긴 세월 동안 잊지 못할 아름답고 행복했던 지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박 전 대표 캠프는 이날 오전 해단식을 겸한 마지막 회의를 갖고 경선 활동을 공식 마무리했다. 이날 회의에는 안병훈, 홍사덕 공동 선대위원장과 서청원 상임고문 등 캠프 핵심관계자들과 원외 당협위원장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안 위원장은 "투표에서는 이기고 결과에서는 진 후보가 승복하면서 위대한 정치지도자 한 분을 새롭게 탄생시켰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유정복 비서실장은 전날 저녁 박 전 대표의 자택 방문 사실을 언급하면서 "(박 전 대표는)동지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는 또 이름까지 거명해가면서 너무 고생한 관계자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면서 "이와 함께 전대에서 후보가 진실로 하신 말씀에 대해 혹여나 우리 식구들이 불필요한 혼란이나 오해를 하지 않도록 자제해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애초 예상과는 달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오전 내내 삼성동 자택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지지자들이 당사와 박 캠프 등지에서 '경선 불복'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캠프는 자중해줄 것을 호소했다.
김재원 대변인도 "지지자 여러분 중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애통한 심정을 토로하시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박 전 대표는 경선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승복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며 "마음으로 승복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박 전 대표가 진정 바라는 것이고 그의 품격을 높여주는 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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