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복고왕 되려다 길을 잃다
80년대에 대한 명랑 판타지 ‘해적 디스코왕 되다’ 후반부로 갈수록 맥빠진 영웅담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8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를 위한 영화다.
주황색 공중전화기, 병우유, 연탄재, 포니 자동차, 귀마개, 똥지게… 그리고 디스코. 영화는 80년대를 연상시키는 이 같은 문화적 코드를
전면에 배치해 ‘향수’를 자극한다.
몇 년 전부터 복고가 유행이지만, 최근 충무로에서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복고영화가 유독 쏟아지고 있다. 복고가 시대적 트렌드로 떠오른 것은,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상실한 아날로그적 삶에 대해 그리움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추억을 되씹는 일은 숨막히는 현실에
대한 잠깐의 도피이자, 속도에 대한 최소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마냥
선하고 달콤한 인물들
이처럼 불만족스러운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추억은 늘 아름답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또한, 이러한 복고의 법칙에 따른
영화다. 역사적 현실의 암울함은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에게 똥리어카를 끌게 하고, 누이를 술집으로 내모는 ‘가난’과 중동에 돈
벌러 간 아버지와 춤바람 난 어머니 등의 가족 풍경들은 80년대 사회 현실에 대한 비애가 묻어난다. 하지만, 그마저도 달콤하다.
사고를 당한 아버지를 대신해 똥지게를 짊어진 봉팔(임창정)의 사정을 안 친구 해적(이정진)과 성기(양동근)는 함께 똥지게를 지는 의리를
보인다.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봉팔의 여동생이자 해적의 첫사랑인 봉자(한채영)가 술집에 나가게 되자 해적은 봉자를 구하기 위해 깡패와
맞선다. 봉자를 데리고 있는 디스코텍 주인(이대근)은 또 어떤가.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조폭들과는 사뭇 다르게 로맨시스트인 그는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 봉자를 내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다급해진 해적은 춤선생을 찾고, 결국 성기 엄마의 춤바람 사건을 일으킨 제비(정은표)에게
개인교습을 받는다.
그 무엇도 심각하지 않고, 그 누구도 악인은 아니다. 영웅인 해적 또한 걸출하거나 위대한 영웅상과는 거리가 먼, 귀엽고 순진한 보통 10대이다.
모든 상황은 유쾌한 코미디와 낭만에 묻혀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80년대에 대한 행복한 판타지이다. 윤색되고 미화된 그대로, 낭만적이며
사랑스럽고 정이 넘치는 80년대의 ‘추억’을 그려낸 이 영화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휴식과 함께 애틋함을 줄만한 요소를 많이
안고 있다.
팬시점의
복고상품 같은 영화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상에 대한 즐거움’은 소품이나 의상 외에서는 찾기는 힘들다. 마치 고가로 포장돼 팔리는 불량식품이나 딱지 모양 악세서리
같은 복고상품들처럼 단순하다. ‘웨딩싱어’ 식의 확실한 유치찬란함의 미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80년대 문화 코드에 대한 성찰과 표현이
풍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개가 깔끔하지 못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진다. 영화 전개상 절정이 되어야 할 디스코 대회
장면도 시시한 감이 있다. 주연 남녀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도 영화를 다소 맥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는 지나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조연배우들의 뛰어난 코믹 연기가 그것. 이 영화의 코미디는
상당부분 연출의 유머감각이나 설정보다 연기에 의존하고 있다. 안정된 양동근과 원숙한 김인문, 단연 돋보이는 임창정의 코믹 연기, 룸싸롱
사장으로 분한 안석환과 비밀댄스교습소의 춤선생 제비를 맡은 정은표의 연기는 압권이다. 특히, 스크린에 오랜만에 등장한 이대근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80년대 코드이다.
추억도 예쁘게 색칠되어 팬시점에서, 또는 극장에서 팔리는 시대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보면서 잠시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단편적인 문화 코드와 감성에만 의존한 상품은 얄팍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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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