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대한 ‘불량’한 인식
발전 저해하고 시장구조 왜곡시키는 만화 정책의 문제점
이른바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면서 만화는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영화, 게임 등과 함께 21세기 대중문화를 선도할 장르로 만화를 포함시켰다. 관련 학과만 해도 80여개에 이르는 등 만화는 전도유망한 최첨단
문화산업으로 회자되었다. 만화에 대한 이러한 떠들썩한 분위기에 정작 만화가들은 ‘갸우뚱’하다. 만화가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내용으로나 정책적으로나 만화계는 빈곤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만화에 대한 인식도 실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다. 한달전의 MBC 정보오락프로그램 ‘느낌표’ 파문이 이를 잘 말해준다. ‘느낌표’의 인기
코너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소설이나 인문서적을 많이 읽은 출연자들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만화를 자주 읽는다는 출연자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시대 만화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다. 어쩌면 만화가들을 화나게 한 것은, MBC가 아니라 만화에
대한 시대적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만화연대 신성식 사무국장은 “오락프로그램에서 만화가를 백수로 묘사한다든지 우습게 그렸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영향력이 높고 공익성을 강조하는 교양프로그램에서 만화를 다른 서적과 차별해서 보도하는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원고료, 10년전 그대로
작년에 우리만화연대에서 제작한 전시기획동영상 ‘이 시대에 만화가로 산다는 것은’은 만화가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생생하게 담았다. 관계자들의
인터뷰로 엮어진 이 동영상에서 만화가 김린은 “만화를 떼려치울 수는 있어도 인생을 떼려치울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탄식한다. 만화에 대한
정열만으로 작업을 계속하기에는 생존권의 위협이 가혹하다는 의미다. 만화가 윤태호는 “만화계의 시스템과 생리를 알게 되니까 만화 그리는 것은
정말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확신이 들더라”며 절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현재 만화 고료는 10년전부터 동결된 상태다. 물가가 상승하는데 비해 만화가들의 고료는 멈춰있으므로 대폭 하락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객관적인 수치는 없지만 한달 수익 70정도의 만화가들이 많다고 보면 된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부심을 느낄 만큼 사회적 위상이 높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특히 IMF 이후로 출판만화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해 현재까지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첨단 문화산업이라는 만화가 왜 이렇게 허덕이고 있을까. 여기에는 만화를 하위문화로 여기는 편견에 찬 대중 인식과 국가의 잘못된 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만화는 저속한 것,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90년대 말부터 문화산업이라는 화려한 이름을 붙였지만,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만화가들의 안일한 창작 자세도 문제다. 하지만, 만화의 질은 환경 탓이기도 하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만화는 사는 것 아니라 빌리는 것?
시장구조의 허약함은 만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대중은 만화는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서 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여점 제도는 만화시장을 1/10로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책을 써야 하는 작가들은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만화가 오세영은 “대여점 들어가면 끝이다.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정당한 대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장구조에서 의욕을 상실한 만화가들은 “어차피 돈만 벌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일본 만화를 베끼기 시작했고, 한국만화의 질은 급격히 추락했다.
80여개의 관련학과가 생겨나고 있지만, 인력양성 제도도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대학의 만화과는 단순한 상업적인 목적에 의한 증설이 많다.
그러다보니 준비도 이루어지지 않은 학과들이 성급히 만들어졌다. 학력을 중요시하는 교수채용의 풍토에서 중견 만화가들조차 강단에 설 수 없었고,
엉뚱하게도 미대출신들이 교단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대출신 교수들은 지나치게 시각적인 기술만 강조한 나머지 만화 특유의 상상력과
내용의 발전은 억누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련 학과가 증설될 때마다 만화계에서는 “실업자 양성소가 또 하나 생겼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화가들은 하지만 통렬한 자기반성도 빼먹지 않는다. 오세영은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만화가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화가 양영순은 “기똥차다 말할만한 작가가 없다. 세상의 속도를 못 쫓아가고 있다.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며, “물론
동기부여를 해주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다”고 꼬집었다. 우리만화연대 김형배 이사 또한 “자기성찰이 먼저 필요하다. 작가 자신에 대한 자기
검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는 단순한 상품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정부의 왜곡된 정책이다. 정부의 만화정책은 모든 문화정책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문화라는 특수한 분야를
산업으로만 단순히 생각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비현실적인 정책들이 만들어졌고, 돈 되는 ‘상품’에만 투자를 하는 기형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IMF 이후 출판만화 시장의 붕괴도 이러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다는 지적이 많다.
전문가들은 만화의 산업적 발전을 위해서는 출판만화의 탄탄한 진흥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출판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게임으로 무한대로
증식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만화정책은 애니메이션 분야에만 집중되어왔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상업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결과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애니메이션이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인식은 허구라고 말한다. 문화평론가 이재현은 ‘정부 출판만화 정책의 진단과 대안’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현실에서 출판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아직 ‘노동집약적’ 산업인 것이 현실이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정부의 정책은 “멀티미디어
하드웨어의 장비 도입에만 치중되어 있으며, 심지어 중복투자가 이루어져 국가 전체에서 보자면 예산낭비를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만화에 대한 몰이해와 전시행정의 결정판은 정부의 검열제도다. 만화가 이두호는 “가장 큰 문제는 검열이다. 만화의 문화적인 측면이나 상업적인
측면들을 만화가들이 정립하기도 전에 정부는 검열로 작가들을 억눌렀다. 단련을 받다보니 만화가들은 익숙해졌다. 돌을 치울 생각은 안하고 피해만
다닌 것이다”며 역설했다.
청소년보호법 중에서 개정이 가장 시급한 부분은 ‘불량만화’란 용어의 삭제이다. ‘불량만화’라는 모호한 용어는 그동안 ‘만화사냥’의 도구로
쓰여왔다. 평론가 이씨는 “문화창작물을 마약 등과 같은 맥락에서 다룬 비문화적인 법이다”고 비난했다. 한국만화가협회 김수정 회장은 “97년
청보법이 시행된 이후, 1천7백여 종 이상의 만화가 유해매체로 선정되면서 만화계가 크게 위축됐다”며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만화계가 집중
공격을 받아 만화가들은 자기 검열에 시달리기까지 한다”고 성토한바 있다.
사전검열 제도가 위헌판정을 받고,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 ‘불량만화’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