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미술가, 옷 벗는 관객
‘관계’에 대한 관습적 해석 뒤엎는 ‘빨래행위전’
서울 관훈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
이색적인 빨래방이 차려졌다. 하얀 불이 들어오는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 사루비아’라는 간판을 내건 이 빨래방은 미술가 오인환씨(39)와
관객의 소통 공간이다. 전시 제목은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서 따왔다. 인종갈등과 동성간의 끈끈한 사랑을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보여준 이 영화의 내용은 간접적으로 전시의 주제를 짐작케 한다.
빨래방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오인환씨는 무료로 빨래를 해준다. 관람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참여자는 남자로 국한된다. 세탁물은 신청자가
입고 있는 옷 중에서 원하는 것을 의뢰할 수 있다. 하지만 가져오는 것은 금지다. 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하는 동안 작가와 참여자는 빨래방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세탁이 끝나면 세탁물은 사진 촬영 후 돌려준다.
촬영된 세탁물은 사루비아 다방 한편에 전시된다. 옷들은 보기만 해도 세제 냄새가 향긋하고 까칠한 느낌이다.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개어져 있는
것이 작가와 참여자의 따뜻한 소통을 상징하는 것 같다. 작품 중에는 셔츠, 바지, 속옷까지 가지런히 놓여진 사진도 있다. 윗도리만 벗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속옷만 벗고 다시 겉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빨간 양말에 여자 속옷을 세탁물로 내놓은 참여자도 있다. 세탁물의 양과
종류는 빨래방안에 위치하는 두 사람의 심리적, 정서적 신뢰도, 적극성, 개방성 혹은 둘 관계의 사회적 판단까지 드러내는 증거물이 된다.
그리고 개인적 또는 사회적 인간관계에 대한 관습적 해석을 뒤엎는다.
“다양한 소통 가능하다”
왜 남자만 참여가 가능할까? 이것은 전시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다. 이번 프로젝트의 컨셉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관계’다. 이미 게이로 커밍아웃
한 작가는 자신의 존재가 성정체성에 갇혀 제한적으로 인식됨을 경험해왔다. 작품의 내용보다는 ‘게이 작가’라는 타이틀이 먼저 따라붙기 일쑤였고,
모 언론은 이번 전시 리뷰에 ‘동성애자의 애환’이라는 부적절한 제목을 달아 왜곡된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느껴왔던 이러한 인간관계의 편견과 획일성, 권위주의의 문제를 ‘남성 대 남성’ 관계에서 찾고자 했다. “한국사회에서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와 군대식의 권위주의가 지배한다. 게이라는 성정체성에 대해서도 여자들은 대체로 포용하는 반면, 남성들은
경직된 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수직적, 이분법적 관계에 익숙한 남성들에게 빨래방은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과 수평적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소통의 장소가 된다.
세탁을 하러 온 참여자는 “왜 이런 작업을 하느냐?”고 묻고, 직접 빨래를 하는 작가는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떻냐”고 질문한다.
옷벗기를 ‘각오하고’ 빨래방을 찾아온 참여자는 어느 정도 사고가 열린 경우가 많다.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빨래행위전의 의미는
크다. 물론 “옷을 다 벗고도 편안한 사람이 있고, 양말 한 짝 벗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작가의 표현대로 인간군상은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소통은 이루어진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타자와 즐겁고 다양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강조한다. 별나
보이는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미덕은 인간적이고 낭만이 넘친다는데 있다. 현대미술이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빈번히 이야기 해왔다면, 빨래행위전은
그것을 뛰어넘은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푸른 색조의 세탁물 사진들은 성적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면서도, 그들의 삶이 암울하기만 하다는 고정관념을 유쾌한 유머로 깨고 있다.
인간관계와 공간의 연관성
작가는 ‘관계’ 외에 ‘공간의 정체성’ 탐구를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인간관계는 공간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성장하다 5년간 미국에 체류했던 작가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에 따른 인간관계의 변화를 절실히 경험했다. 자신의 성적정체성도 공간에
따라 다르게 다루어졌다. 미국에서는 특히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미국 빨래방에서 만난 사람은 작가를 주인으로
생각했다. 동양인들이 미국에서 가장 널리 하는 장사가 빨래방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공간의 성격에 따라 규정지어지는 경우”라고 작가는
지적한다.
공간이 인간관계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 하필 빨래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작가의 기억 속에 미국의 빨래방은
편안한 소통의 공간이다. 수돗물이 집집마다 나오기 전, 한국의 아낙네들에게 빨래터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옷을 벗는다’는 장치 외에도,
‘교류의 장’이라는 코드로 빨래방을 설정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형식적으로 생활공간, 작업공간, 전시공간의 중첩과 통합을 통해 작가는 폐쇄적인 미술 공간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다. 작가와
참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한정된 공간은 지극히 사적이며, 관객과 작가는 하나의 공간을 다른 입장에서 공유하게 된다. 사루비아 다방의 시멘트가
노출되는 중성적인 공간은 수용의 폭이 넓다는 면에서 전시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전시는 끝났지만, 작가는 공간을 옮겨서 빨래방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두 달 남짓의 전시 기간동안 완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관객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탁을 원하는 사람은 전화 02-733-0440으로, 이메일은 sarubialaundry@yahoo.co.kr로 신청하면 된다. 참여자가
빨래방에 맡길 옷을 고르는 그 순간부터 예술행위는 시작된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