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문화활동인가, 무분별한 스타사랑인가
스타팬픽을 둘러싼 창작과 선정성논란
유명 연예인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는 월드컵
스타들을 만나기 위해 K리그가 열리고 있는 운동장을 찾고 있는 이들이 많다. 대형 플래카드와 응원도구는 기본이고 갖가지 튀는 복장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선수의 눈길을 한 번이라 받아보려는 여학생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이버상에서 팬카페를 만들어
선수의 정보를 공유하고,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을 쓰기도 한다.
대중문화 수용의 적극적인 형태
팬픽은 ‘팬 픽션(Fan Fiction)’의 준말. 말 그대로 팬들이 자신들의 스타를 주인공으로 삼아 만든 소설을 말한다. 외국에서는 원작의
큰 줄기는 유지하되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이른바 속편 쓰기의 한 형태로 구분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1970년대부터 ‘스타트랙’의 팬픽 쓰기가 시작됐을 정도로 활발한 문학 장르의 하위문화로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외화 ‘X-파일’은 어느 정도의 전문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팬픽을 쓸 수 있다. X-파일 전문 팬픽사이트(http://www.xfanfics.pe.kr)는
지난 1999년부터 X-파일에 대한 ‘팬픽션’과 ‘가상파일’을 내놓아 네티즌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곳에 등록된 글을 보면 여느 소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재미가 있다. 원작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만을 제공한다면 팬픽은 원작의 어떤 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메시지를 삽입하는 등 제2의 창작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다.
‘스타팬픽’의 유행
유명 외화에 대한 팬픽 보다 국내 청소년들한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신화, 클릭B, JTL 등 미소년 중심의 인기 그룹과 월드컵
이후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축구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스타팬픽’이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팬픽’을 치면 여러 개의 사이트
목록이 뜬다.
그룹 신화의 팬픽을 써 온지 2년이 되는 김선정(21·여)씨는 얼마 전 개인 사이트를 마련해서 열흘에 한 번씩 글을 올리고 있다. 김씨는
팬픽 쓰기에 대해 “신화 멤버들의 성격을 잘 안다면 더 재미있게 쓸 수 있다” 면서 “좋아하는 스타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어 자유로움을
느낀다”며 팬픽의 재미를 늘어놓았다.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나 댄스그룹의 인터넷 팬사이트에는 팬픽을 쓸 수 있는 ‘픽션방’이 따로 있을 정도다. 문화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영상매체
시대의 아이들이 가장 고전적인 장르인 소설을 통해 창작을 배우고 있다”며 “스타들의 만들어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가 소설의 형태인 팬픽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동성애 표현에 대한 논란
우리보다 앞서 팬픽이 유행한 일본의 경우 팬픽이 동성애 문학의 한 부분이 됐다. 일본이 월드컵 16강까지 간데 비해 한국이 4강에 오르자,
일본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잠시 동안 한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팬픽 쓰기가 붐을 이루었다.
국내에서도 동성애를 다루는 팬픽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지 이미 오래다. 현재 팬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연예인은 대부분 남성그룹들, 이들
남성그룹 멤버끼리의 사랑을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다. 동성애가 주된 소재가 된 이유는 다른 여자에게 자신들의 ‘오빠’를 빼앗기기 싫은 심리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문화평론가 한성호씨는 동성애를 다룬 팬픽에 대해 “사춘기 소녀들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중매체와 인터넷이 영향을 줘서 생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고 있다.
한씨는 성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의 사춘기 소녀들이 성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을 동시에 갖게 되는데, 남학생들처럼 음란물이나 자위행위 등으로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 관련된 공상 또는 이야기를 즐기려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산물이 팬픽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인 문화현상일 뿐”
인터넷 팬픽 사이트 ‘팬픽어스’의 회원으로 있는 신은지(25·여)씨는 팬픽에 동성애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팬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룹 멤버들이 모두 남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서 “그렇지만 일본의 ‘야오이’와는 분명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야오이(미소년 동성애를 다룬 소설)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동성애 자체를 묘사하기 보다는 오락과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신씨는
“스타팬픽은 동성애를 매개로 스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라며 일부 언론의 비판적 평가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쳤다.
일부 청소년 전문가들은 스타팬픽에 대해 청소년들의 무분별한 성적 호기심이 유명 연예인에 대한 관심과 결합되어 동성애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이는 스타에 대한 적극성의 표현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팬픽이 과연 창조성의 바탕이 될지, 아니면
스타를 사랑하는 자기만족에 그칠지는 결국 그것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키고 수용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그 과정에서 팬픽의 위상은 판가름 날
것이다.
진희정 기자 kiki037@sisa-news.com